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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34. 대구 구암서원
[서원] 34. 대구 구암서원
  • 김현목 기자
  • 승인 2019년 04월 17일 21시 59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4월 18일 목요일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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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민초의 삶 따뜻하게 보듬은 품격높은 애민정신 가득
구암서원(초현당)은 벽의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중인방을 일컫는데, 1788년 경상 이조원이 중방을 초현으로 명명 하였다. 1943년 낡은 초현당을 중수해 현재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구암서원은 조선시대 애민정신과 사회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서원이다.

또한 대구에서 규모가 가장 크면서도 보존이 잘 된 서원으로 꼽힌다.

△애민정신 실천의 상징 구암서원.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 서남쪽 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 선생을 봉향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717년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하고 1718년 3월에 사가 휘거정 선생, 1741년 2월 약봉 휘성 선생, 1757년 8월 함재 휘해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1778년 본도유림이 서원 청액소를 올리고 1779년 유림과 본손 합의에 의해 서원수계를 받았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됐다고 1924년 유림에서 복설했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이 증수됐다. 숭현사를 1974년 보수하고 1975년 2월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됐다가 대구직할시 승격 후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1995년 대구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 내로 옮겼다.

대구부민이 구계선생을 숭현사에 봉향하게 된 이유는 애민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구계선생은 조선 초 달성서씨 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으며 임금이 달성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땅을 내주는 대신 지금의 영선시장과 서문시장 자리에 대한 세금을 서씨 일문에 받게 했다. 또한 남산고역과 동산일대 땅을 주고 두터운 상과 세록을 주겠다는 뜻을 보였다.

중요한 것은 구계선생이 이를 백성들에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구계선생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신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가문보다는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청한 뒤 대구지방의 환곡이자를 한섬에 다섯되씩 감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국왕이 선생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칭찬한 뒤 대구 도호부에서 이를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 대구부민은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침의 은혜에 백성들은 감동했고 1665년 구암서원의 최초 건물인 숭현사를 세워 선생을 모셨다. 후대에도 선생을 기리는 일이 이어졌으며 1971년 달성 성내 중심부에‘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구암서원은구계 서침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서원으로써1665년 남산동에 세워졌으나 동산동으로 1718년이건했다.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규모는 가장 크지만 보존이 잘된 구암서원.

구암서원은 강당·숭현사·비각·제수청 등이 있고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돼 있다.

구암서원에 들어서면 2층에 고풍스러운 ‘연비루’가 등장한다. 연비루는 시경 대아한록에 연비려천 어약우연 이란 명언 속에 있는 연비에서 따왔다.

서원 부지명이 연암이기에 燕(연)을 鳶(연)으로 바꿔 강한 것으로 상징케 했다. 직역하면 ‘소리개는 하늘 위를 날고 고기는 연못속에 뛰놀고 있네’를 뜻한다. 새나 물고기 같은 미물들이 스스로 만족해 하는 모양에서 나아가 임금의 덕화나 조상의 은덕이 백성이나 후손에게 미치는 것을 상징한다.

2003년 11월 백강 서수생이 이름을 짓고 현판의 글씨는 근원 김양동이 서 했다.

1층 마당 왼편으로는 백인당이 한옥으로 들어서 있다. 중국 당나라 시대 장공예의 집안이 9대로 한 집안에 동거한 것을 듣고 당 고종이 그 비결을 묻자 인자 백개를 써서 임금께 올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참는다는 뜻이다.

안쪽으로 제사를 맡아보는 대청인 전사청이 있다,

전사는 장예원 벼술의 일종이며 국가에서 정한 제사 등 고대 주대에 춘관이 제사를 관장한 벼슬이었다.

서원 향례 시 제수의 마련과 진행과정을 맡아보는 대청과 그것을 행하는 건물의 총칭이다. 달성서씨 족회 사적비도 위치해 있는데 대구에서 현존하는 시비중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우란 서희순이 1833년 5월 경상감사로 도임, 1년 뒤 달성공원에다 종족 600명을 초청해서 화수회와 시회를 열었다. 같은 해 9월 화수회 식상에서 연시회의 시를 새긴 비석이 사적비다. 사적비는 달성서씨 9명이 각각 일련씩 지어 전체가 한 시작이 되도록 했으며 9명의 자작연구를 자필로 써 시비에 새겼다.

△구암서원 제향오현.

구암서원은 구계선생 등 5명의 현인이 배향하고 있다.

그중 사가선생은 세종부터 성종 때까지 다섯 임금을 모셨다.

많은 저서를 남긴 것은 물론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는 등 조선 초기 학계에도 큰 공을 세웠다.

신라 이래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문을 선집한 저서 동문선을 간행, 조선 초기 한문학을 집대성했으며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했다. 낙재선생은 명종 5년(1550)에 팔거현 외가에서 출생해 광해 7년(1615)에 별세한 학자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공산성에서 의병대장으로 추대 됐으며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 회맹에 참가했다.

평생 교화로 정사 학규를 만들어 학도들에게 학문을 연마하는 방법과 몸을 닦는 규범을 제정, 평생 실행할 수 있도록 강학 했으며 문하생이 180여 명이 있었다.

약봉 선생은 명종 13년부터 인조 9년까지 활동하셨으며 임진왜란 당시 호소사 황정욱의 종사관이 돼 함북에 이르러 정욱 등이 두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될 때, 홀로 탈출했다. 그 뒤 암행어사로서 삼남을 순찰하고 돌아와 제용감정에 특진 됐다.

이른바 고명 7신의 한 분으로 선조의 유명를 받은 중신이었다.

학문을 즐겨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른바 3대 직계 정승, 3대 직계 대제학이 배출된 명문은 유일하게 약봉 후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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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목 기자 hmkim@kyongbuk.com

대구 구·군청, 교육청, 스포츠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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