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파리에서 1차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강화회의가 열렸다. 연합국 대표들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혹해 독일 국민은 분노했다. 전승국들의 복수극으로 받아들인 독일인들은 이 조약을 ‘베르사유의 명령’이라 비꼬았다. 이 조약을 무기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철저한 복수극을 펼쳤다. 프랑스가 자랑하던 ‘똘레랑스(관용)’를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이 조약에 따라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내 놓았다. 알사스 로렌 지방은 프랑스가 가져갔다. 독일 영토를 조금씩 떼어 덴마크, 벨기에, 폴란드 등에 넘겼다. 빚잔치 하듯 영토 나눠 먹기로 독일은 종전 영토의 13%, 인구의 10%를 잃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싹을 잘랐다. 잠수함, 전투기 등 첨단무기 보유를 금지 시키고 유일하게 육군만 허용, 그마저도 병력이 10만을 넘지 못하도록 단서를 달았다. 더욱 가혹한 것은 132억 금마르크의 전쟁 배상금이었다. 달러로 환산하면 330억 달러, 우리 돈으로 4조 원이었지만 현재 가치로는 수 백조 원이 넘는 천문학적 액수였다. 독일인이 대대손손 죽으라고 일을 해도 갚기 힘든 요구였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은 잦은 충돌로 견원지간이었다. 프랑스는 이참에 독일에게 확실하게 보복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정부는 영국 프랑스 등에 배상금 지불을 5년 늦추어 달라고 간청했다. 프랑스는 “배상금을 갚지 않으면 루르 지방을 점령하겠다”는 엄포와 함께 간청을 거절했다. 1922년 독일이 채무불이행 디폴트를 선언하자 프랑스는 독일 최대 탄광도시인 루르에 병력을 투입했다. 독일 국민은 불복종 운동으로 프랑스 점령군에 맞섰다.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2년 동안 독일인 132만 명이 희생됐고, 15만 명이 추방당했다. 독일인들은 이를 갈면서 영웅이 나타나 복수해 주길 갈망했다. 이 같은 염원에 편승, 히틀러가 등장했다. 만약 프랑스가 복수 대신 관용을 베풀었다면 히틀러 등장과 2차대전 비극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복수의 광기가 복수의 광기를 낳는 복수의 악순환이 인류의 재앙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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