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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크게 상하이(1919년 4월~1932년 5월)시기와 대장정의 이동기인 항저우, 자싱-난징, 전장-창사-광저우, 포산-류저우-치장을 거쳐 마지막 임시정부인 충칭(1940년 9월~1945년 11월)에서 광복을 맞는다.

상하이가 독립운동 기지로 시선이 모아진 것은 1912년 7월에 예관 신규식(대통령장)과 박은식(대통령장)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동제사’이다. 신규식(1879~1922)은 신해혁명의 주도자인 쑨원(孫文)과 쑹자오런(宋?仁)과 교류하면서 신해혁명에 참가하고 중국 국민당의 천치메이(陳其美·대한민국장), 후한민(胡漢民·대통령장), 천궈푸(陳果夫·대한민국장) 여천민(대통령장)등과 신아동제사도 설립한 인물이다. 이후 박달학원(1913), 신한혁명당(1915), 국민주권설을 선언한 1917년 대동단결선언, 신한청년당(1918) 등에 관련하면서 대한민국 통합임시정부 법무총장을 역임했다. 박은식은 2대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임시정부는 수립되었으나 정체상태에 빠졌다. 특히 국무총리 이승만과 군무총장 이동휘의 취임 거부는 임시정부의 출범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표류하고 있던 상해 임시정부가 제대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5월 내무총장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노력 끝에 1919년 9월 6일 수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통합임시정부의 개정헌법이 탄생했다. 9월 7일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9월 11일 임시정부는 신헌법을 공포하고 내각을 발표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대통령장), 내무총장 이동녕(대통령장), 외무총장 박용만(대통령장), 군무총장 노백린(대통령장), 재무총장 이시영(대한민국장), 법무총장 신규식(대통령장), 학무총장 김규식(대한민국장), 교통총장 문창범(대통령장), 노동국총판 안창호(대한민국장), 경무국장 김구(대한민국장) 등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3일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등이 함께 취임식을 해 임시정부가 통합정부뿐만 아니라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최초의 좌우합작정부가 된 것이다.

1920년 이동휘는 소련 자금소동으로 말썽을 일으켜 사퇴하고 이후 이동녕·신규식·노백린 등이 차례로 국무총리대리를 맡다가 1922년 9월 노백린 내각이 구성되면서 국무총리대리 체제는 종식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만주, 연해주, 미주, 중국 등의 120여 개 단체와 130여 명의 참가한 국민대표회의는 김동삼(대통령장)을 의장으로 안창호와 윤해(독립장)를 부의장으로 임명하고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총 74차례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신숙·문창범·윤해의 창조파, 여운형·김동삼·안창호.이동휘의 개조파, 김구·이시영·송병조(독립장)·윤기섭(대통령장)의 임정고수파로 논쟁을 벌이다가, 해산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가 해산한 뒤, 이승만을 탄핵하고 1925년 박은식을 대통령에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어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였다. 국무령제 정부조직에서 이상룡(독립장)·양기탁(대통령장)·안창호·홍진(독립장)등이 차례로 국무령에 선임되었으나 조각이 유산되거나 길지 못하였다. 결국 김구가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지도자 반열에 올랐으나 1927년 다시 제3차 개헌을 통해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면서 이동녕이 주석을 맡았다. 이후 좌우파의 합작운동인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지지부진함을 떨쳐 버린 사건은 1932년의 이봉창(대통령장)의 일황 저격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였다. 그들은 김구가 1931년 조직한 한인애국단 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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