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우리 주변에는 극한 어려움과 상황 속에서도 삶에로의 의지를 가지고 내일을 꿈꾸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이 있다.

사람의 목숨은 생각보다 그리 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서도 장점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면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살고자 하는 것만큼 살아지는 법인 것이다.

장래가 유망한 스물하고도 다섯 살 된 여배우가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또 다른 우울함을 안겨준다.

왜 죽어야만했을까? 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어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 남긴 유서들이 일부이긴 하지만 여과 없이 공개되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구구한 해석을 하도록 한다.

타인의 주검 앞에서 너무 경솔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해 보지만, 어차피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인 만큼 어찌하겠는가?

네티즌들은 네티즌들 나름대로 한 마디씩 하고 싶어 사이버 공간에서도 그녀에 대한 추모의 열기가 들끓고 있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보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삶에로의 의지력이 너무 약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솔직히 그만한 미모에, 그만한 재능에, 그만한 출세? 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가 올랐던 자리에 오르고 싶어 준비하며, 노력하며 땀 흘리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녀가 올랐던 자리는 아무나 쉽게, 하루아침에 오를 수 있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소위 말하는 스타는 천재일우의 기회 속에서 찾아오는 축복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한 순간 홀연히 그렇게 떠나가 버린 것이다.

산다는 것은 분명 어렵지만 반면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녀는 어렵게 살아가야 할 삶을 선택하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을 선택했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어떤 말로도 미화할 수 없고, 그 죽음을 합리화 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한다. 어려운 것보다 쉬운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이웃을 보지 못했다.

한 마디로 아래의 삶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위로 오르는 인생만 인생인 줄 알았지, 아래에서 땀 흘리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로 올라오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설사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들의 삶의 애환과 아픔과 고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떠 안타깝다.

삶이란 훨씬 복잡하고 고단한 것이다. 그녀가 안고 있었던 자신만의 고민이 우울증 - 죽음의 원인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으로 번졌고, 그 고민을 견디지 못해서 삶의 마지노선을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녀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질병과 싸우다 죽었다.” 라고도 한다. 무엇이, 누구의 말이 사실이든 상관없다. 그래도 그렇다. 죽음만은 피했어야 했고, 죽음만은 뛰어넘었어야 했다.

밤잠을 자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독하고 외로웠어도,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죽음이라는 그것만은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인생은 각본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삶의 길목에서 만난 각본에도 없는 삶의 무게와 고민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우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죽음 앞에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사치스런 변辯이 될까 조심스럽다.

그러나 떠나 버린 그녀이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하고 싶다.

‘그래도 살았어야지요. 그래도 살았어야지요.’ 모든 사람이 삶에 무게에 짓눌러 힘들어하는 이 때에 오히려 당당하게 대중 앞에 나서서 힘들고 어렵지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삶에로의 의지를 보는 주는 연기자로 우리 가까이 남아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늘이 당신께 주신 시대적인 사명이라고 여겼어야 했었는데…”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온 천하를 가진다 할지라도 네가 죽어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를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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