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중

사람이란 누구나 나름대로 삶의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기준삼고 평가하고 저울질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이란 자기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이 삶의 법리(法理)를 상관치 않으면서 인생의 거래금(去來今)을 계수하려 합니다.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삶의 질문 하나를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

예기(禮記)에 나오는 “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道” 즉 구슬은 갈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옳은 길을 갈 수 없다는 말처럼 그 길을 가기 위하여 우리는 학도(學道), 수도(修道), 구도(求道), 행도(行道)를 합니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존재(Being)가 아니고 존재화(存在化)로 정의합니다. 그것은 “되었다”가 아니고 “되어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모든 것이 내리막 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되어져 간다는 의미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적용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날마다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터득한 ‘에밀 꾸에’는 ‘자기 암시에 의한 자기 지배’라는 세계적 명저를 쓰면서 “나는 날마다 모든 일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용비어천가’의 첫머리에 나오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마르지 않는다”는 시구(詩句)도, 서산대사가 갈파한 ‘不自屈 不自高也’ 즉 스스로 굽히지도 않고 스스로 높이지도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어져 가는 존재로 이해할 때 적용되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장자(莊子)가 말한 ‘시호명명 청호무성(視乎冥冥 聽乎無聲)을 일상생활과 목회생활에 날마다 적용하면서 하루를 살아 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소리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목회의 내면에 지니고 생활합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혜안(慧眼)이며 영안(靈眼)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을 듣는 귀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소리, 양심의 소리, 영혼의 소리, 지혜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는 소리없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귀가 열리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입니다. 이것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기를 기도하면서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새벽 기도를 마치고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때로는 산에 올라 바위에 무릎꿇고 눈을 감으며, 때로는 산정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면서시 호명명 청호무성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가끔 자괴지심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말한대로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어쩐지 목회자인 나에게 아픔으로 밀려올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뒷맛이 좋은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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