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완연한 봄이다. 들판이나 산에 나가보면, 냉이와 쑥, 두릅과 가죽 그리고 참나물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된다. 냉이를 캐고 쑥을 뜯어서 우리의 식탁에 올려 보면 식탁에 봄내음이 물씬 풍긴다.

봄은 더불어 솟구치는 계절, 두릅의 순이 한 뼘씩 올라왔다. 싱그러운 초록의 얼굴이다. 가시에 손을 찔려가며 두릅의 새순을 따서 모아 본다. 알싸한 봄 내음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한 해 한 해 세월을 보내면서 새롭게 느껴보는 생명에의 환희가 아닐 수 없다.

봄의 화원에서 맑은 소리로 재잘대는 새들의 생명력이 핏줄처럼 내 몸을 타고 흐른다. 삶 또한 저와 같아서 유유히 흐르는 것이 아닐런지.

문득 하나의 의문을 품어본다.

우리는 산이나 들에서 우리가 직접 채집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것들이 어디서 유래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이땅에서 움트게 되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풀 한포기, 나물 한 줌도 우리들에게는 단순한 식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다. 그냥 두면 더 자라서 꽃을 피우고 씨앗을 퍼트려 온 땅에 퍼져나갈 능력을 지닌 생명체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위해 급급해 생명가진 것들을 강제로 채취하여 밥상에 올리고 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참으로 많은 생명들을, 갓 올라온 싹들을 앗아 먹음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 생태계로부터 큰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으며, 그만큼 큰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초봄에 고개 내민 새순이 무성해져 녹음을 만들고 그늘을 드리우는 것처럼 시간의 변화를 느끼며 나는 희생이란 것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용납해 본다. 사랑과 고통이란 것도 새로운 생명을 건져올리기 위해 바다위에 드리운 낚싯대와 같은 것이란 것을.

낚싯대에 건져올려진 생명처럼 삶은 그렇게 기록되어지기에 우리는 고마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슈바이처 박사는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체들에 둘러싸여 있는 살고자 하는 존재이다."라고 말하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를 외쳤다. 지구촌의 생명체들은 모두 다 살고 싶어 할 것이다. 또한 각자 나름대로 살아갈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들을 가만히 두면 인간들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삶을 잘 살다 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종류의 생명들을 매일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닐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오늘 우리 자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무엇을 희망하면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며 내 안에 채워지길 원하는가?

우리는 참으로 우리와 함께 한 것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수많은 생명들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존귀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는가?

우리 자신은 매일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수많은 생명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음식 등 많은 것들을 받고 또 받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일이다. 아직도 더 가지고자 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데에만 온통 마음을 쏟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더 갖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가득 품고 마음의 빈곤과 허욕에 시달리지 말 것이다.

지금 '살아있음의 기쁨'을 누릴 여유를 가져보자. 맑은 공기를 원없이 들이키고, 맑은 물을 시원하게 마시자.

온갖 정성으로 준비한 음식을 감사함으로 맛있게 먹으며, 편안한 잠자리의 안식을 누려보자. 이것은 수많은 섭리로 나를 돌보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뜻이리라.

환경을 정의하여 이르기를 '인간 주체를 둘러싸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형, 무형의 객체의 총체'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생명체들이 의식을 지닌 인간의 일부로 고귀하게 부활시켜 이 세상에 존재한 보람을 가지게 할 수는 없을까? 숙연함이 묻어나는 봄의 한 나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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