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환(편집위원)

그것이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종교란 인간 정신의 진수로서 사회를 유지·발전시켜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정신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것이다. 19세기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힐티가 밝힌 '종교는 생명의 소금이요 힘이며 그 힘의 원천인 사랑은 모든 걸 이긴다'는 견해는 종교에 관해 말할 때마다 인용되는 경구가 됐다. 그보다 앞서 17세기 영국에서 보석 같은 수상에세이의 새 장르를 개척해 문명(文名)을 날린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종교란 사회의 부패를 막는 향료'라 표현했다. 문호 톨스토이는 "종교가 발전할 때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진보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종교 발전이란 지금까지 없던 진리를 새로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보다 빛나게 정련(精鍊)하는 것"이라고 일깨웠다.

박애, 헌신, 희생 그리고 순교는 종교의 요체임에 틀림없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불씨를 당긴 자연법 사상가들은 종교 회의론자나 무신론자가 많았지만 지배자 위주의 인위법을 비판하며, 영구불변의 보편타당성에 기초해 '모든 인간은 불가침, 불가양의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 사상과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를테면,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인, 절도, 간음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연법적 규범이 성경의 구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베르그송은 '종교란 이성과 지성 파괴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 반작용'이라고 종교를 옹호했다. 그러나 19세기 서양의 걸출한 철학자 가운데 힐티와 베르그송과 같은 유신론자도 없지 않았지만, 종교에 대한 비판자들이 많았다. 칸트는 종교를 철학의 영역으로 보고 '철학이 종교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니체는 '이제 신은 죽었고, 철학(이성)이 종교를 대체했다'고 선언했다. 마르크스는 '종교란 인민의 아편'이라고 보다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 나름대로의 종교의 허구성과 폐해를 성토했다.

이 같은 현상은 과학문명의 발달이 가져다 준 사회풍조와 과학문명을 활용한 서양의 제국주의적 정치체제가 내적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외적으로는 전쟁을 통해 대량 살육을 자행하는데 대한 지식인들의 좌절과 절망이 표출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당시 기독교는 타 지역 종교와 인종에 대해 우월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제국주의의 확산에 일조했다. 자본주의 연금술이 만들어낸 황금이 교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교직자들은 이권과 권력을 둘러싸고 내적 세력다툼에 몰입되기도 했다. 현재 유럽에는 유서 깊은 교회는 많으나 찾아오는 신도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007년 유난히 무더운 여름 온 국민의 고통에 열기를 더한 셈물교회가 파견한 선교 봉사단의 아프가니스탄 내 피랍사건은 서양의 19세기 판 선교활동의 재판 같았다. 기독교의 우월적이고 배타적 태도가 꼭 닮았다. 한 피랍자 어머니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일을 진행시킬지 기대가 크고 참 신나고 재미있다"고 한 간증 동영상이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갔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미국의 작가 로버트 퍼시그가 말한 '개인의 망상이 정신이상이라면, 다수의 망상은 종교가 된다'는 패러독스가 문득 떠오른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이 작가의 이 말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옥스퍼드대 석좌교수인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가 쓴 '신의 기만(God Delusion)'이라는 책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런 유의 패러독스를 인용하며 책을 시작, '종교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자살 폭파범도, 2001년 9·11 참사도, 마녀도, 유대인에 대한 박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전쟁도, 고대 불교 석상을 파괴하는 탈레반도, 속살을 내보인다는 이유로 여인에 가해지는 채찍질도, 번들거리는 양복을 입고 TV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었을 것'이라고 종교의 악덕을 통렬히 비판했다.

세상을 교화하는 빛인 종교가 이제는 세속인이 걱정하고 우려하는 괴물이 됐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 싸움으로 인류는 멸망의 길로 들어설 것인가? 종교를 세속인들이 걱정하게 된 세상에서 종교가 진정으로 '사회의 소금이 되며 부패를 막는 향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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