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 손씨 후손…포항 기계 학야리가 고향
경주 중고 졸업 후 서울대 진학 철학의 길로

손봉호 동덕여대총장

"주위에서 여러 친구들, 특히 우리집 아이들이 언론을 너무 탄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나는 사회를 좀 더 질서있고 정의롭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겁니다. 몇 사람으로부터 욕먹는 것을 두려워해서 방관자처럼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초 한국의 현대 중견시인 100명이 '한국 현대시 100년의 해'를 맞아 자신이 가장 좋아 하는 한국 현대시 100편씩을 추천했다. 그 결과 고(故) 김수영시인의 '풀'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왜 시인들은 김수영의 '풀'을 가장 좋아 했을까. 이에대해 한 언론은 '시인 김수영은 자신의 시(詩) 처럼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즉 김수영은 '작품(시)과 삶을 별개가 아닌 하나'임을 실천했던 시인이라는 것.

그렇다면 현재 국내에서 성직자가 아닌 학자로써 '사회정의'와 '윤리(생명)운동'을 가장 열심히 실천하는 인물 몇사람을 추천한다면 누가 될까.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동덕여대 손봉호(70) 총장도 그 중 한명에 포함될 것이라게 일반적 여론이다.

그는 30여년을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 대학교수가 본업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부업(?)에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할애하고 있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언론들은 그를 '이 시대의 양심' '한국의 대표적 시민운동가' '종교개혁가' '장애인의 대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한국외국어대, 서울대에서 25년간 철학을 강의하다 2004년부터 동덕여대 총장으로 자리를 옮긴 대학교수가 본업이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공동대표, 경실련 공동대표,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상임 공동대표,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의 대표를 지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서울문화 포럼대표,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대검찰청 감찰위원회 위원장 등의 부업 일에 열중이다. 부업이 한두개가 아닌 여러개를 하고 있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의 말대로 그의 인생은 한우물이 아닌 '여러 우물을 판 인생'이라 할 수 있다.

포항이 고향인 그를 지난 16일 서울 성북구 월곡동 동덕여대 총장실에서 만났다. 방학중이라 캠퍼스는 조용했다. 단신에 가녀린 몸매, 해맑은 얼굴에서 악동(惡童)끼(?)마저 묻어났다. 옅은 웃음을 띤 채 어릴적 고향 이야기를 할 때는 '시민운동가' '종교개혁가' 등의 닉네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먼저 "10년은 젊게 보이는데 평소 어떤 운동을 하느냐"고 묻자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고 틈 날때 걷는게 유일한 운동이라면 운동"이라고 말했다.

그는 포항에서 시골인 기계면 학야리에서 2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예 통정대부를 지낸 고조부가 세거지인 경주 양동(양동 손씨 집성촌)에서 병 치료를 위해 물이 좋다는 인근 기계면 학야리로 이사하면서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

부친은 비록 농사를 지었지만 마을 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는 등 유학도로서의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어릴때부터 양반적 가풍속에 자랐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 6·25를 맞았다는 그는 "그때는 마을 사람 모두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다"며 "마을에 시계있는 집이 없어 문풍지에 비친 햇살의 그림자를 보고 등교 시간을 알았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어릴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그는 기계초등학교를 마친 후 경주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당시만해도 행정구역상으로는 포항(당시 영일군)이었지만 거리상으로는 경주가 가까웠기 때문에 경주에서 하숙을 했다.

그는 중학교때 친구와 함께 교회에 처음 나갔다. 아버지가 한학을 한 까닭에 교회에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부모 몰래 나간 것이 그가 평생 기독교적 인생관을 살 게 된 뿌리가 된 것이다. 그는 지금 장애인 학교로 유명한 '다니엘 학교'의 강당을 빌려 세운 교회인 다니엘교회(서울 양천구 신월동)의 은퇴장로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을 통해 그의 인생관을 들어봤다.

-철학을 하게 된 동기는.

"철학을 전공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서울대 영문과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학자들의 강의와 설교를 듣고 인상을 받아 종교과에 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인 부모님은 법대로 진학해 사법고시를 원했다. 법대에 죽어도 가기 싫어 타협안으로 선택한 것이 영문과였다. 하지만 대학강의를 들어면서 종교학, 윤리학, 철학등의 과목을 열심히 청강했다. 아마 그것이 최초의 동기가 된 것 같다."

-기독교적 인생관을 갖게 된 것은.

"군수물자를 취급하는 육군 방위중대 쫄병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순진한 기독교적 신앙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각종 비리를 보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거기서 나는 부정직한 국민들에게 영어학이 큰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판단, 그만두기로 했다.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 생각,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군대 비리가 삶의 방향을 설정한 셈인데…

"지금 나는 그때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교육을 조금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대학강의외에 언론 등을 통한 사회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쏟는 것도 그런 경험과 결심때문이다. 특히 도덕교육에 치중하는 것도 군대생활에서 받은 충격의 영향이라고 보면된다."

-여러우물을 판 것을 후회하지 않나.

"여러우물을 판 것은 줏대가 없는 탓도 있겠지만 결국 호기심과 야심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은 좀 철이 들어 내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숙명이라 생각한다. 사실 시간이 있으면 다른 분야를 또 공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철학공부가 나에게 준 가장 큰 도움은 인간인식의 한계를 깨닫게 한 것이었다."

-철학과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데 고민이나 한계는.

"주위에서 자주 묻은 질문이다. 20년간 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새로운 교회를 셋이나 설립했으니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과거 여러 위대한 철학자들이 매우 신실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양자는 배타적일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신앙이 철학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독교 신앙이 나로 하여금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철학하는데 지장을 준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윤리 및 사회운동을 하는 이유는.

"철학, 특히 내가 전공한 서양철학으로는 사회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사회의 도덕성, 장애자들의 어려움, 한국 기독교의 부패 등이 더 심각한 문제인 것 같고, 철학에 내가 공헌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큰 공헌을 그쪽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불만은 없었는지.

"학생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내가 강의에 소홀함이 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비판을 해달라고 했다. 학생들도 나의 뜻을 이해해줬다."

-장애자 문제에 큰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내가 갖는 모든 관심은 궁극적으로 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다름아닌 인간의 고통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고통은 너무 심각한 것이어서 어떤 다른 것도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어떤 방법이나 길이라도 인간의 고통을 줄이는데 공헌한다면 그것은 보람된 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구절을 특히 좋아한다"며 "여러 우물을 파면서 많은 귀중한 파편들을 주웠으며, 그것들은 지금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의미있게 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고향에 선대 묘가 있어 1년에 1~2번은 포항에 내려간다"는 그는 "죽으면 고향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 손봉호총장 약력

▷포항시 북구 기계면 학야리 태생(1938년생)

▷기계초등,경주중·고교, 서울대 영문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졸업(신학석사, 196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철학부 졸업(철학박사,1972년)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철학부 전임강사(1970~7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1973~8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교수(1983~2003년)

▷한성대학교 이사장(2003~2004년)

▷동덕여대 6대 총장(2004~현재)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윗물은 더러워도' '나는 누구인가'

'오늘을 위한 철학' '고통받는 인간-고통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 등 저서 다수.

▷국민훈장 모란장(1998년)

▷부인과 1남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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