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竹馬故友' 정영식 효성아동병원 명예원장

정영식 효성아동병원 명예원장

"55년 지기 (이명박 대통령)를

나라에 바치고 5년 후 되찾을 겁니다.

친구가 퇴임 후

국민에게 존경받고, 역사에 길이 남을

자랑스런 대통령이 되길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죽마고우(竹馬故友)'

정영식(65) 대구 효성아동병원 명예원장.

그를 봄기운이 완연한 지난 6일

대구시 수성구 중동 효성아동병원 10층

정영식(65) 대구 효성아동병원 명예원장이 컴퓨터에 저장된 55년지기인 이명박 대통령 사진을 보며 미소짓고 있다.

원장실에서 만났다.

"그 친구와 첫 만남은

포항 영흥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였을 겁니다.

3·5·6학년 때도 같은 반, 같은 분단생이었죠.

머리가 좋고 운동신경도 뛰어난 모범생이었으나

가끔씩 결석을 하곤 했습니다.

분당장인 내가 발표에서 실수를 하고 낙심하자

'괜찮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면서

어린 나이에도 어른스럽게

격려를 아까지 않은 친구였습니다."

그는 이 대통령과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교 졸업까지 고향인 포항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다. 이 시절 이 대통령과 동해바다 모래사장과 간꽃 피는 염전에서 책가방을 골대삼아 맨발축구를 하며 함께 뒹굴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같은 모태신앙으로 포항제일교회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둘 사이 우정은 더욱 깊었다. 그는 정확히 말해 절친한 친구는 셋이라고 말했다.

"학생회 총무인 저, 서기를 맡은 이 대통령, 회계를 맡은 김성원(미국 시카고 외과 개원의)은 삼총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우정만이 1등이 아니었다. 그는 포항고를, 이 대통령은 동지상고를 각각 1등으로 입학했다.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이 대통령이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친구의 가정형편을 알았다"며 "저는 부친이 포항고 교사여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지만 그 친구가 그토록 어려운 줄은 몰랐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가난한 티를 찾아 볼 수 없는 친구였지요. 전면 학비 감면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낮에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기에 동지상고 야간부에 들어간 걸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죽도시장에서 생선 좌판을 하며 어려운 살림을 살던 이 대통령 어머니는 처음에는 이 대통령을 고등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

이 대통령 담임선생이 썩히기 아까운 학생이라며 야간부에 가면 낮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는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으나 어머니는 이마저도 거부했다고 말했다.

형(현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서울대에 다니기 때문에 동생(이 대통령)이 번 돈은 형의 학비에 보태야 한다는 것. 담임선생님은 그쯤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수석으로 입학하면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니 시험이라도 쳐 볼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결국 이 대통령의 어머니는 담임 선생의 뜻을 받아 들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보란듯이 당당히 1등으로 동지상고 야간부에 합격했다.

1960년 정 원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 대통령과 이별했다. 경북대 의과대학에 진학하면서 친구와의 추억이 서린 포항을 떠났다. 연락도 끊어졌다. 의대생활이 그리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친구 이명박을 다시 만났다. 지난 1973년 고향 친구 결혼식장에서 였다. 그는 동산병원 산부인과 수련의였고,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상무였다.

영일만 까까머리 얄개들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의젓한 사회인으로 다시 조우를 하게 된 것.

"정말 가슴이 벅찼습니다(정 원장은 당시를 생각하며 감동을 잊지 못하는 듯 안경 넘어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명박아! 니가 명박이가, 친구야 정말 반갑데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후부터 두 사람은 매년 1~2차례씩 만남을 가졌다. 주로 그가 서울 학회에 참석할 때였다. 그가 "어떻게 젊은 나이에 상무까지 됐냐"고 묻자 이 대통령은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히 하다 보니…."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후부터 친구는 해마다 명함이 달라졌다. 상무로 만난 다음해 전무가 되더니 그 다음해에는 부사장이 됐다. 결국 친구는 사장까지 올랐다.

친구는 일 뿐만 아니라 국가관도 투철했다고 회고했다. "한번은 그와 소주잔을 주고받다 갑자기 그 친구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일어서는게 아닙니까. 초장으로 화장지에 태극기 문양을 새기더니 머리에 두른 뒤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가사 한자 틀리지 않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고 했다.

그도 1975년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을 따면서 사회 지도층 반열에 올랐다. 동산병원에서 근무하다 1979년에는 대구시 서구 원대동에 자신의 병원을 차렸다. '정영식 산부인과'. 여기서 지난 2002년까지 23년 동안 병원장을 지냈다. 2002년 6월 효성여성병원의무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환자를 돌보다 지난해부터 명예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지금은 진료시간을 축소해 오전에만 환자를 보고 봉사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의 봉사활동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개원의가 되던 1979년 대구 YMCA 회원으로 가입한 이후 29년째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직업이 의사이다 보니 의료봉사는 어김없이 그의 몫.

대구 YMCA 이사장(2001~2002년)과 함께 YMCA를 물질적, 정신적으로 후원하는 '국제 와이즈맨 크럽'의 한국동부지구 총재도 지냈다. 올 7월부터는 대한민국협의회 의장으로 취임할 예정이다.

그가 지금은 대구 수석교회에서 남다른 신앙 및 봉사활동에 헌신하는 것도 자신과 이 대통령의 모태 교회였던 포항제일교회때 신앙심이 밑거름이 됐다. 그는 장로를 거쳐 현재 명예장로다. 매월 마지막 주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는 외국인근로자와 노인들을 진료한다. 수석교회는 최근 주차장을 개방했다. 교회도 이제 지역사회를 위해 베풀어야한다는 그의 지론에 따른 것.

그는 이 대통령 취임이후 단 한 차례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물론 당선되기 직전까지는 수시로 통화를 했었다.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친구를 나라에 바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걸림돌'보다는 '디딤돌'이, '로열패밀리'보다는 '로열프렌드'가 더 오래가고, 가치가 있는 삶이라고 설명했다.

기자가 갑자기 최근 언론의 질타를 맞는 장관인선 이야기를 꺼냈다. "인사가 만사인데 좀 더 신중하고 철저한 검증을 거쳤으면…."이라며 아쉬워했다. 이어 "주 1회는 쉬어야 한다. 젊은 비서진들도 죽을 맛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타고난 체력이라도 쉼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면서 친구의 건강을 걱정했다.

끝으로 앞으로 계획을 물어봤다.

"노인복지, 그중에도 치매노인과 폐경기 노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 건강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하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봉사활동의 끊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 진료실 벽면 한켠에 걸린 '시(詩)' 한편이 눈에 들어왔다. 시인인 친구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 선물한 것이라 했다.

'간꽃피는 염전에서 우리는 맨발로 자랐지… 짠물을 먹고 자란 영흥 껄레기. 우리는 제법 잘난 친구가 되었지' -서정만의 '친구여' 중에서-

정영식 효성아동병원 명예원장은…

▷포항시 죽도동 태생(1942년)

▷포항 영흥초교, 포항중·고(9회)

▷경북대 의과대학 졸업(1966년)

▷'정영식 산부인과' 원장(1979년)

▷'재구포우회' 초대 회장(1982년)

▷한양대 의과대학 박사과정(1984년)

▷'국제 와이즈맨 클럽' 한국동부지구 총재(1995년~1996년)

▷대구시의사회 감사(1996년)

▷대구효성여성병원의무원장(2002년)

▷대구YMCA 이사장(2001년~2002년)

▷아시아복지재단후원회장(1986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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