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원숭이 다람쥐문 오석벼루.
포도 원숭이 다람쥐문 오석벼루.

 

옛 선비들 중 벼루에 미친 사람이 셋 있었다. 그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 정철조(1730~1781)다. 조선 후기의 교양인이었던 그는 돌에 미친 바보 ‘석치(石痴)’라는 별명을 달았을 정도다. 그는 수시로 벼루를 깎아 책상 위에 쌓아 뒀다가 달라는 사람에게 선뜻 나눠 주곤 했다. 당시 조선 선비들이 중국 명품 단계벼루 못지 않게 ‘정철조 벼루’ 하나 소장하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로 그의 벼루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동아시아 벼루 계보 ‘동연보(東硯譜)’를 쓴 유득공,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 등이 그의 벼루 애호가였다고 한다.

‘동연보’를 쓴 유득공(1748~1807)도 벼루에 대한 애착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오죽했으면 벼루의 계보까지 정리했을까. 그의 벼루와 관련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친구 이정구에게서 일본 명품 벼루 ‘적간관연(赤間關硯)’을 빼앗은 심경을 시로 남겼다. “벼루를 보고 갖고 싶었다/ 친구는 매우 곤란하다는 표정/ 미불(米芾)은 옷소매에 벼루를 숨겨 훔친 일이 있고/ 소동파(蘇東坡)는 벼루에 침을 뱉어 가진 일 있네/옛 사람도 그러 했거늘 나야 말해 무엇하랴/ 낚아채서 달아나니 걸음도 우쭐우쭐” 벼루가 오죽 탐났으면 몰래 갖고 튀었을까.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1168~1241)는 벼루 예찬을 넘어 벼루와 생사를 같이하겠다 노래했을 정도다. ‘소연명(小硯銘)’이란 글에서 “벼루야 벼루야, 네가 작지만 너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네 비록 한 치쯤의 웅덩이지만 끝없는 뜻을 쓰게 하노라. 내 키가 비록 여섯 자나 되지만, 사업(事業)은 너를 빌려야 이뤄진다네. 벼루야, 나와 너는 함께 돌아가리니, 살아도 너 때문, 죽어도 너 때문이야.”

타닥타닥 손으로 글을 치는 컴퓨터 시대에도 벼루에 빠진 사람이 있다. 경주에서 35년 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박봉을 털어 1500여 점의 벼루를 수집한 손원조씨(77)다. 온갖 노력으로 모은 진귀한 벼루를 한데 모아 그는 박물관을 만들었다. 벼루를 사랑한 조선 시대 선비의 정성에 못지않다. ‘경주취연벼루박물관’이 24일 문을 열었다. 주말엔 마음 속에 벼루 하나 품으러 가야겠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