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

판문점 선언 1주년을 기념하여 남한이 단독으로 기획하고 공연한 ‘먼, 길’ ‘멀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기획자가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첫 공연인 린 하렐이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은 현재의 남북관계를 상징했다. 1717년부터 1723년 사이 바흐는 코텐의 궁정 악장으로 있으면서 무반주곡을 완성했다. 첼로는 선율악기로 반주악기가 따르지 않으면 표현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으나 바흐는 첼로의 모든 기능을 살려서 표현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남한은 최고의 아티스트를 모아 최상의 세련된 공연을 통해 판문점 1주년의 의미를 극대화하였지만, 북한이 빠지면서 무반주로 끝났다.

2차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를 통해 “금강산과 개성 공단 재개를 미국과 논의하겠다”고 천명했다. 그 후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이 원하는 사실상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접근 방안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4월 12일 김정은은 시정연설을 통해 남한을 “오지랖넓은 ‘중재자’, ‘촉진자’”로 비판하였지만 문 대통령은 15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시정연설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평화 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안팎으로 천명, 대화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면서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원한다고 했다.

2019년 4월 29일 현재 북한의 대남정책은 명확하다. 남한이 북한과 한편이 되어 미국을 상대로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평양 9.19공동성명에서 남북이 합의한 대로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북한의 영변핵 시설을 폐기할 수 있다는 방침을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압박하기 원한다. 김정은은 4월 시정연설에서 “9월 평양상봉 때의 초심으로 되돌아와 북남선언의 성실한 리행으로 민족 앞에 지닌 자기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한국의 역할을 규정했다. 4월 27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비망록을 통해 공개한 북한의 입장은 미국에 대한 비난과 “사대적 근성과 외세의존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북남관계개선에 복종”시키라는 한국에 대한 경고로 점철되어 있다. 한국과 미국을 다니면서 비핵화 문제를 다루어 온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해임한 것도 북한 비핵화 문제를 더 이상 한국과는 논의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을 수 있다. 북한이 이전처럼 한국과는 통일전선부를 통해 남북문제만 다루고 북핵 문제는 대미관계를 다루는 외무성으로 이첩한다는 의미이다. 북한은 남한이 공개적으로 천명한 특사 파견도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는 특사는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정은의 시정연설은 북한 인민이 암기하고 지속해서 학습해야 하는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남한의 역할 변경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이상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의미 있는 남북관계를 맺기는 어렵다.

한국은 한 호흡 쉬어가야 한다. 강박적으로 북한에게 구애해서는 안 된다. 남북관계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협상이다. 밀고 당기기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지금같이 남한이 당기기만 하면 북한이 무엇을 하든 한국은 무조건 받아주고 기다리는 고정변수로 간주되어 협상력을 잃게 된다. 한국 정부는 지난 1년을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비핵화의 진전을 보지 못한 이유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특히 북한에만 초점을 맞추던 것에서 벗어나 망가진 주변국 외교를 복원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한일관계는 이대로 두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다. 정상회담을 비롯하여 의미 있는 교류가 없는 중국과 러시아도 돌아보아야 한다. 불예측성이 특징인 트럼프 행정부이지만 하노이 회담 이후 놀랍게도 일관된 대북 비핵화 정책을 펼치는 미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비핵화 방안이 필요하다. 정부 출범 이후 수시로 바뀐 비핵화 정책을 복기하고 한국 나름의 일관된 비핵화 정책을 만들어 상황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이끌어 가야 한다.

더 이상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앙상블을 이룬 오케스트라의 협주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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