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 필 무렵에 가득 담갔던 김치를
아카시아 필 무렵에 다 먹어 버렸다

움 속에 묻었던 이 빈 독을
엄마와 누나가 맞들어
소낙비 잘 오는 마당 한복판에 내 놓았습니다

아무나 알아 맞혀 보세요
이 빈 김치 독에
언제 누가 무엇을 가득 채워 주었겠나

그렇단다
이른 저녁마다 내리는 소낙비가
하늘을 가득 채워 주었단다

- 동그랗고 조그만 이 하늘에도
제법 고운 구름이 잘도 떠돈단다.




<감상> 늦가을에 담갔던 김치가 다음 해 아카시아 필 무렵에 동이 나 버렸네요. 가난한 시절 먹을 게 없으니 김치와 동치미를 몰래 훔쳐 먹고, 찐쌀은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먹곤 했지요. 빈 독처럼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으므로 자연물이 대신해 주었어요. 소나무의 속껍질인 송기(松肌), 찔레순, 참꽃, 삐삐순, 산딸기 등 먹을 것이 지천으로 깔려있었지요. 빈 독에 고인 소낙비가 하늘을 가득 채워 주듯이, 그렇게 마음은 순수하고 풍족했지요. 독에 비친 구름들은 얼마나 고왔던지 우리의 고운 마음들도 잘 떠돌아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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