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 시인·안양대 교수
맹문재 시인·안양대 교수

김규동 시인은 작고하기 전까지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통일을 노래했다. 시인이 한평생 부른 노래들은 남북 분단이 70년이나 되었는데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기에, 우리 국민들의 통일 의식이 점점 옅어지고 있기에 더욱 소중하게 들린다.

김규동 시인은 1948년(24세) 김일성종합대학의 교복을 입은 채 월남했다. 그는 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입각한 문학 공부를 강요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시를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문학동맹’의 가입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자 그 고민은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런 끝에 스승으로 삼고 있던 김기림 시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고 월남의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1925년 함북 종성에서 태어난 그는 향리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함경북도 경성군에 있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는데, 그곳의 교사로 재직하던 김기림 시인으로부터 수학과 영어 과목을 배웠다. 개인적으로 시 쓰기도 배웠다.

김기림은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을 가지고 문명의 변화를 간파한 지식인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그를 1930년대의 모더니즘 시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역사의식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큰 오류이고 왜곡이다. 그가 친일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견고한 민족의식이 확인되는 것이다.

김기림은 자신을 찾아온 제자를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김규동이 월남해 의정부 경찰서에 스파이 혐의로 구금되어 있을 때 신원보증을 서고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상공중학교(현재 중대부고)의 교사 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그 무렵 김기림은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한 경력 때문에 일자리를 얻는 것은 물론 작품 발표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를 위해 헌신적으로 돌봐준 것이다. 김규동이 문학의 길을 찾아 월남한 결단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부모 형제와 이별해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김기림은 그와 같은 상황을 이해하고 제자의 길을 기꺼이 열어준 것이다.

그러던 김기림이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는 바람에 남한에 홀로 남게 된 김규동은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며 살았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책을 읽고 시를 쓴 것이다. 1·4후퇴 때 부산에서 박인환, 김경린 등과 ‘후반기’ 동인을 결성해 혼란한 시대를 반영한 모더니즘 시 운동을 펼친 것이나,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하여 군사 독재에 맞서는 창작 활동을 한 것이 그 모습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집 ‘나비와 광장’, 평론집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 산문집 ‘나는 시인이다’ 등 사회 참여 의식을 지닌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스승이 자신에게 베풀었던 것처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후배 문인들을 품었다.

스승의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필자는 새삼 김규동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당신이 월남할 때 품속에 넣고 온 김기림의 시집 ‘바다와 나비’를 필자에게 선뜻 건네주셨을 뿐만 아니라, 2011년 마지막 시작품을 남기고 이 지상을 떠나는 자리에 필자를 불러줄 정도로 아껴주셨다.

등불이 언제까지나 희미한 적 없어요/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의 길 걸어왔지요/청춘은 알지 못할 위대한 길/두고두고 생명을 괴롭혀 왔습니다/생명은 너무 길었지요//시인이 왔습니다, 불운으로/그가 하늘과 구름 사이로 노래해 주었습니다/나는 시인을 따라 밤길을 걸었지요/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은 하나의 길/그 고독이 나에겐 그리운 종소리였습니다//시인이여/안녕”(‘인사-맹문재 씨에게’ 전문).

필자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학문을 하고 시를 써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품어야 할 이유도 분명하다. 심호흡을 한 뒤 선생님의 존함을 불러본다. 김규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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