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요즘 본의 아니게 ‘오타쿠’(御宅)가 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타쿠란 말은 원래 ‘애니메이션, SF영화 등 특정 취미·사물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고 사교성이 결여된 인물’이라는 부정적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부터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단순 팬, 마니아 수준을 넘어선 ‘특정 취미에 강한 사람’,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는 긍정적 의미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냥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오타쿠족(族)을 자처합니다. 집 밖의 일에는 관심이 아예 없습니다. 직장에 나가서도 연구실에 한 번 들어가면 수업 시간 외에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예전에는 캠퍼스 주변을 걸으며 산책도 즐기고, 동료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서 담소도 즐기곤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그런 사교적인 일들이 제 일과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입니다. 스스로 오타쿠족을 자처하지만 그렇다고 무엇 하나에 몰입해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 책 저 책 찔끔거리며 책장을 넘기기도 하고, 때로 몇 자 적어서 페이스북이나 브런치와 같은 SNS 매체에 싣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혀 무료하거나 외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근 본 책 중에 ‘행복을 부르는 자존감의 힘’(선안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페이지엔가, “관계 중독, 인정에 집착하는 나”라는 제목 아래 작은 글자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모습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가치는 타인의 사랑과 인정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다”였습니다. 지당한 이야기였습니다. 딱 지금 제 처지에 맞는 말이었습니다. 행복해 지려면 무엇보다도 자기만족이 우선이지요. 행복감은 전적으로 자기만족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자기만족의 경지가 쉽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것은 마치 신기루 같아서 다가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인정(認定)’에 늘 목마른 상태입니다. 그러니 사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인정투쟁의 여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실감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논어’ ‘학이’편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그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는 말은 정말 좋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정을 가장 원하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모범이 되려 하고 가르치려 하고 더 알고자 하는 이들’, 즉 학인(學人)들일 때가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돈이나 권력 같은 세속적 열락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 특히 중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학인은 그 ‘인정’에마저 초연해야 한다고 공자는 말합니다. 자기만족만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미 2천5백 년 전에 그런 통찰이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스스로 자기만족을 찾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직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목숨을 거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인정’을 소유하기 위해 불철주야 관계 맺기에 몰두합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정작 본인은 ‘텅 빈 시니피앙’이 되어갑니다. 본인의 자체 내용은 사라지고 그때그때 채워지는 임시적 내용물들이 자신의 정체성이 됩니다. 이른바 ‘관계중독’입니다. 오타쿠족에게는 그들이 천적입니다. 몰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들을 그들 때문에 알게 되어 기분이 상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본인들은 자신들이 정상이고 그런 행태를 경원시하는 이쪽을 병든 인간이라고 멸시합니다. 그런 분들이 우리 오타쿠를 만나면 늘 하는 말이 “요즘 통 안 보이시데요?”입니다. 그 말이 부끄러운 인사라는 걸 그들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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