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옥산·소수·병산·도동서원…사설 교육기관·정형성 갖춘 건축문화

경북일보가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는 ‘서원’ 가운데 경북·대구지역 5곳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전망이다.

한국의 서원은 400여 년을 지속해 온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자산이자, 정신문화의 산실이자 예학의 산실이다. 나아가 겸손과 절제를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자연과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며 학문연구를 통해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한 자아 성찰과 자기 고뇌의 현장이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정신문화라고 한다면, 단연코 ‘선비정신’이 꼽힌다. 선비정신은 학문은 물론 생활 전반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선비를 길러내는 역할을 하던 곳이 바로 ‘서원’이었다. 서원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선현에 대한 제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육의 기능이었다.

한국의 서원은 현재 600여 개가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경북지역이 서원 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경북·대구지역 서원을 소개한다.

안동 도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이자 선비의 전형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7)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써 사액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중심이 됐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자리한 도산서원(사적 제170호)은 대한민국 대표 서원 중 하나로 꼽힌다. 서원 경내에는 동서재와 전교당(보물 210호), 위패를 모신 상덕사(보물 211호) 등 다양한 건축물과 약 400종 4000여 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 그리고 퇴계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그가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퇴계는 일찍이 서원이 세워지는 곳은 존경받을 만한 선현의 일정한 연고지여야 하고, 동시에 사림들이 은거하여 수양하며 독서에 좋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물들은 한결같이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퇴계의 인품을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 자락 산수가 빼어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조건을 갖춘 도산서원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의해 엄격하고 질서 있게 배치됐으며 이러한 건축의 특성은 절제되고 단아함을 보여준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1557년 57세가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해,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해 1560년에 낙성한 건물이다. 세 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인데, 서쪽 한 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한 칸은 그가 거처하던 완락재이며, 동쪽의 대청 한 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이다.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한 이곳은 퇴계 선생의 소박하고 절제된 건축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조선후기 화가 강세황은 도산서원이 성리학자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자연조건을 갖춘 곳에 세워졌음을 1751년 ‘도산서원도’에 표현했다.

경주 옥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에 포함돼 보호받고 있는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세상을 뜬 지 20년이 지난 후에 창건됐다.

그가 타계한 후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창건했으며, 1574년에는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그 현판 뒤에는 아계 이산해가 쓴 또 다른 현판도 걸려 있다. 옥산서원은 회재를 모신 사당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공간, 강학 공간, 서재 등 서원으로서의 형식적 공간을 갖고 있다.

정문인 연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가 있고, 강당인 구인당의 양쪽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강당 뒤쪽에 서 있는 것이 회재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이다. 동재의 오른쪽으로 지어진 여러 건물들은 서원의 살림을 맡았던 곳이다.

옥산서원의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 체인묘, 전사청, 경각, 비각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강학 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를 비롯해 구인당, 민구재, 암수재 등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뜻을 지닌 무변루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이 쓴 것이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 현판도 한석봉이 썼다. 구인당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옥산서원에는 지난 2월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를 비롯해 동국이상국전집 등 고서 4000여 권과 호구단자, 명문, 도록 등 고문서 1156건, 책판 회재선생문집 1123판 등 총 6300여 점의 무형 및 기록유산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지난 2010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에 수장돼 있다.

안강유도회가 옥산서원에서 인성교육의 일환으로 소학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는 서원의 현대적 활용을 통해 전통과 현대문화가 접목하는 고품격문화 체험공간으로 재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옥산서원은 이를 통해 경쟁력 있는 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영주 소수서원
△영주 소수서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단연 으뜸으로 꼽는 곳은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도산서원을 떠올리지만, 소수서원은 도산서원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사립고등교육기관이다. 실제로 소수서원은 미국 하버드대학보다 100년 이상이 앞선 역사를 가지고 있다.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건립됐다. 소수서원의 창건 당시 이름은 백운동 서원으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회헌 안향 선생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선생의 연고지에 사묘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해 백운동 서원을 건립했다.

서원을 세운 것은 주세붕 선생이지만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황은 풍기군수를 사직해 자신이 사직하게 되면 백운동 서원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해 왕에게 편액을 내려줄 것을 청했던 것이다.

퇴계는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을 통해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명목은 서원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를 포함한 여러 차원에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상소문을 본 어린 명종이 우리나라에 서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끼게 됐고, 대제학 신광한(申光漢·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해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소수’로 결정했다.

1550년(명종 5) 2월에 친필로 소수서원이라고 적은 편액을 서원에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 등의 서적을 내렸다. 이때부터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불리었고,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 영예를 얻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해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사액을 내려 국가가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 사업을 조정이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안동 병산서원
△안동 병산서원

안동 하회 병산서원은 자연과 조화하는 한국 서원건축의 공간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있다. 병산서원은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해 ‘하늘이 내린 재상’으로 알려진 서애 류성룡(1542~1607)과 그 아들인 수암 류진(1582~1635)을 배향하고 있다.

병산서원의 모체는 풍악서당이다. 이 서당은 안동 풍산읍내 도로변에 있어 시끄러워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1572년(선조 5)에 서애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풍악서당은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7년 재건됐다. 풍악서당이 서원으로 바뀌게 된 것은 1614년(광해군 6)에 사우를 건립하고 서애의 위패를 모시면서부터다. 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병산서원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절경과 건축미다. 빼어난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이라 불렸는데 아마 병산이 없었다면 이곳이 절경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푸른 병풍 같은 절벽을 의미하는 병산은 두보의 ‘백제성루’라는 시 내용을 인용해 그렇게 지었다.

만대루에서 주변 경관을 조망하면 화산을 등지고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7칸의 단순한 만대루의 기둥과 건물은 다양한 선의 연속에 의해 주변 경관을 수직적으로 분절시키고 병산서원의 집합적 질서의 묘미를 집약하는 공간이다.

특히 입교당에서 바라보는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정형미를 외부의 자연경관과 연결시켜 수평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 때문에 만대루와 입교당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고건축, 특히 서원 건축양식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건축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원 정문인 복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당이 있고, 맞은편 한 단 높은 곳에 이 층 누각 만대루가 가파른 계단 위에 옆으로 길게 서서 유식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만대루에서는 주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조화된 병산서원의 미(美)를 더욱 느낄 수 있다.

대구달성 도동서원
△달성 도동서원

‘도가 동쪽으로 왔다’해서 이름이 붙여진 도동서원은 조선 동방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한 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보물 350호다.

도동서원의 전신인 쌍계서원은 선조 원년인 1568년 현풍 비슬산 동쪽 기슭에 건립돼 선조 6년(1573년)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됐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그 후 선조 37년(1604) 지금의 자리에 중건돼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으로 개명했다가 선조 40년(1607)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됐고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봉안했다.

이황은 김굉필을 ‘동방도학지종’이라 칭송했으며 ‘도동(道東)’으로 사액된 것도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동서원은 고종 2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 서원의 하나이다. 이 서원의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돼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해 보존·관리하고 있다.

산·낙동강과 조화 이룬 도동서원은 경치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서원 뒤에 우뚝 서 있는 산과 그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조화를 이뤄 선경을 만들어낸다. 서원 내에는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와 사당, 강당, 수월루 등의 건물들이 있는데, 특히 서원의 건물들을 에워싸고 있는 토담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걸작으로 인정받으며 눈길을 끈다. 이외에도 하사제기가 유전, 보관돼 있고 장판각에는 경현록 판각이 보관돼 있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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