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부름에도 두 임금 섬기지 않은 불사이군 충절 깃든 곳

사양서원 전경
사양서원(泗陽書院)은 화해사(華海祠)로 1888년(고종 25)에 건립되었다. 신현(申賢)[1298~1377], 신용희(申用羲)[1315~1382], 원천석(元天錫)[1330~?]을 배향하고 있다. 신현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신경(信敬), 호는 불훤재(不?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용희의 본관은 평산, 자는 문엽(文曄), 호는 간재(簡齋)이다. 신현의 장남이다. 원천석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사양서원 소슬대문 ‘입도문’
△위치



사양서원을 가려면 파천면사무소 입구에서 청송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1㎞ 이동 후 중평리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중평부길을 따라 약 420m 직진한 뒤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길을 따라 530m 이동하면 사양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은 용전천이 흐르고 주변에는 약 300여 그루의 소나무가 심어진 중평솔밭이 있다. 서원이 위치한 중평리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집성촌으로 서원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곳에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平山申氏 判事公派 宗宅)과 서벽고택(棲碧古宅), 사남고택(泗南古宅)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사양서원 편액
사양서원의 내력은 1975년 배동환(裵東煥)이 쓴 「사양서원이건기(泗陽書院移建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54년(철종 5)에 전국 유림들이 신현을 배향할 서원을 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정으로부터 서원 신설 금지 명령과 이어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88년(고종 25)에 전국 사림의 공의로 충청도계룡산 아래 화해사(華海祠)를 창건하고 신현·신용희·정몽주(鄭夢周)[1337~1392]를 배향하였다. 그러나 점차 화해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정몽주의 신주는 그 후손이 분리하여 다른 곳으로 모시고, 신현·신용희 부자의 위패는 청송의 서쪽 사수(泗水)로 옮겨 봉안하였다. 1966년 원천석을 추향하고, 사천의 양지에 있다고 하여 이름을 사양서원으로 고쳤다. 2004년에 사양서원을 보수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인 화해사 편액.
서원의 구성은 강학 공간인 강당과 동재·서재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제향 공간인 사당이 뒤에 자리 잡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사당인 화해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화해사(華海祠)」 현판은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친필이다. 강당인 선교당(宣敎堂)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재인 함양재(涵養齋)와 서재인 극소재(克紹齋)는 건물의 규모가 동일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정면에 툇마루가 있다.

사양서원 입구 표지석.
사양서원((泗陽書院·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0호)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12대 손이며 평산신씨 영해파 시조인 문정공을 주벽으로 그의 아들 문훤공과 원운곡을 동서 종향으로 고려시대 문신 신현(申賢)의 위패와 함께 봉안하고 배향하고 있다. 사양이라 함은 사천의 양지쪽을 뜻함이며 매년 음력 3월 15일 서원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사양서원은 화해사(華海祠)로 1888년(고종 25)에 건립되었다.

사영서원 입구에 있는 중평솔밭.
신현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종유하며 학문에 더욱 전념해 대학자가 되었다. 운곡 원천석은 조선 태종 방원을 가르친 인연이 있어 태종이 여러 차례 기용하려 했으나 고려에 대한 충정을 지켜 끝내 응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

함양재 편액
문정공 신현(申賢)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1932년에 충청도 계룡산 아래 화해사를 짓고 위패를 모셨다. 이때 신현의 전기인 화해사전(華海師全)을 운곡이 편집한 인연 때문에 함께 봉안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주벽에 모신 문정공은 여(麗), 원(元), 명(明) 삼조에 걸쳐 학문이 높기로 유명했으며 명나라 태조로부터 금자광록대부의 직위를 받고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던 우리나라 성리학의 개척자이다.

극소재 편액.
문훤공은 문정공의 아들로 명나라 황제로부터 은청광록대부의 작위를 받았으며 원운곡은 문훤공의 문인(文人)이요 조선 태종의 선생이기도 하다. 원운곡은 일찍이 고려 때 진사에 발탁되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우매 은퇴하여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강원도 치악산에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 후 태종이 누차 사람을 보내었으나 끝내 불응해 마침내 어가(御駕)가 심산 험로를 무릅쓰고 찾았으나 그래도 몸을 피하고 나타나지 않아 결국 태종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일 사람들은 태종이 머물었던 자리에 주필대(駐畢臺))라 표적을 세우고 태종대란 비각을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이방원은 어지러운 정국을 수습하고자 죽은 정몽주를 사면하고 벼슬을 추서할 계획을 세운다. 이 소식을 들은 신현의 후손 신자악이 상소를 올려 살아 있을 때도 조선의 녹을 먹지 않기 위해 벼슬을 받지 않았는데 죽어서까지 조선의 벼슬을 받겠느냐며 이방원을 자극했다.

이에 노한 이방원은 평산 신씨 일가를 멸족시키라 명했다. 이 사실을 안 신현의 제자였던 운곡 원천석이 자신의 스승 일가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신득청의 손자인 쌍둥이 형제, 영석, 중석을 숨겨 대를 잇게 했다.

매년 음력 15일 향사를 지내고있다.
사양서원 내 화해사에 운곡 원천석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된 까닭이다. 운곡은 야사 6권을 직필해 궤속에 깊이 감추었고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자신과 대등한 인물이 아니거든 절대로 궤를 열지 못하도록 간절히 일렀으나 증손 때에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열어 보았다고 한다. 궤 안에는 고려 때의 직필기록이 들어 있어 새로이 들어선 이 씨 왕조에 들키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 불태워 소실됐고 시사(詩史) 1000 여 수는 비밀리에 전해 오늘에 이르렀다.

평산 신씨 여해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운곡쪽 기록은 사실 없다고 전해지며 원운곡은 사문화액(師門禍厄)이 잇달아 일어나 지극히 위험할 때 나이 어린 문훤공의 증손형제를 데리고 원주에 숨어 살게 해 성취(成娶)까지 시켜줌으로 그 자손이 청송, 영덕에 수천 가구가 살고 있다.

다행히 1814년 원운곡, 범복애두 선생이 편집한 화해사전이 햇빛을 보게돼 수백년 동안 끊겼던 사적이 상세하게 드러나므로 오도유림통문(五道儒林通文)과 태학통장(太學通章)이 합치해 성무에 같이 모시게 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여의치 못하고 기호사림(畿湖士林)이 마음과 힘을 합해 먼저 사전을 발간해 반포하고 이어 충남 계룡산 성직동에 화해사를 창건해 향례를 봉행해 왔다.

사양서원 본당
그 후 농지개혁 당시 서원의 땅이 분배되면서 사당의 유지관리책이 막연한 형편이 되자 부득이 유림의 공의로 현 위치로 이건 봉안됐으며 대구 월배 낙동서원과 충남 서천군 비인 율리사, 경남 진주 용현 경백사에 각각 배향되어 있다.

사양서원을 가려면 청송군 파천면사무소 입구에서 청송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1㎞ 이동 후 중평리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중평부길을 따라 한 쪽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은 용전천이 흐르고 주변에는 약 300여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심어진 중평솔밭이 있다. 사양서원이 있는 중평리는 평산신씨의 집성촌으로 서원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곳에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서벽고택, 사남고택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은 강학 공간인 강당과 동재·서재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제향 공간인 사당이 뒤에 자리 잡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사당인 화해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화해사(華海祠) 현판은 백범 김구의 친필이다. 강당인 선교당(宣敎堂)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재인 함양재(涵養齋)와 서재인 극소재(克紹齋)는 건물의 규모가 동일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정면에 툇마루가 있다.

이창진 기자
이창진 기자 cjlee@kyongbuk.co.kr

청송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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