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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40. 경주 용산서원
[서원] 40. 경주 용산서원
  • 황기환 기자
  • 승인 2019년 05월 22일 17시 47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5월 23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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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쳐 나라와 백성 지킨 '백전노장의 충절' 오롯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용산서원 전경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서쪽에 위치한 삼릉을 지나 울산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내남면 이조리가 나온다.

천룡산 자락인 고위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이조마을은 경주 최씨의 유서 깊은 동족 마을이다.

형산강을 가로지르는 이조교를 건너기 전 왼쪽 길을 따라 들어서면 전형적인 농가주택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채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걷다 보면 이 마을 제일 안쪽에 다다른다. 마을 끝에는 수령이 300년은 넘어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이 바로 정무공 최진립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용산서원(경상북도기념물 제88호)이다.
명필인 옥동 이서가 쓴 용산서원 편액
△경주 남쪽 대표서원 ‘용산서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한 정무공 잠와 최진립(1568~1636)을 향사하는 용산서원은 경주의 유교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다.

경주부 북쪽을 대표하는 서원이 옥산서원이라면, 용산서원은 남쪽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용산서원은 나라에 큰 공원 세운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임금이 직접 서원이나 사당의 현판을 하사한 사액서원이다.

경주지방의 사액서원은 서악서원, 옥산서원, 용산서원뿐으로 사액을 받은 문중은 자손 대대로 최고의 광영으로 알았다.

용산서원은 조선조의 청백리이며 충신이신 정무공 잠와 최진립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25) 경주부윤 이형상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했다.

숙종 37년(1711)에 임금으로부터 흰 바탕에 검을 글씨의 ‘숭렬사우’라는 편액을 내려받았으며, 후에 서원으로 승격됐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1924년에 다시 건립됐다.
용산서원의 학당인 민고당 전경
서원 건물의 앞쪽에 교육시설인 민고당을 두고 뒤쪽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숭렬사우’를 두어 전학후묘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용산서원 기문은 영조 35년(1759)에 성호 이익이 지었고, ‘용이 춤추는 것 같다’는 용산서원 편액 글씨는 이익의 형이자 조선 후기 명필인 옥동 이서가 썼다.

서원 오른쪽에는 관리사가 있고,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신도비각이 서 있다.
용산서원의 사당인 충렬사우 전경
경내 건물로는 3칸의 사우, 신문, 8칸의 민고당, 3칸의 전사청, 식강문, 고사, 포사, 유사실 등이 있다.

사우에는 최진립의 위패가 봉안돼 있으며, 강당인 민고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흥인재와 명의재로 돼 있다.
용산서원 민고당 내부 모습
이곳은 사원 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사청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곳이며, 고사와 유사실은 각각 서원의 고자와 유사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하정(세번째 丁日)과 8월 하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유물로는 문헌 500여권과 ‘잠와실기’ 목판본 200여 점이 보관돼 있다.
용산서원 출입문인 식강문(외삼문)
수많은 소나무와 담벼락에 둘러싸인 용산서원 출입문인 외삼문(식강문)을 열고 들어가면 잔디가 곱게 깔린 민고당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옛것을 배우고 익힘에 있어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민고당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 이 건물은 서원 중앙부 학당이다.

민고당에는 ‘어짐을 흥하게 한다’는 뜻의 흥인재와 ‘의로움을 더욱 밝게 한다’는 의미의 명의재 협실이 중앙에 마루를 두고 각각 우측과 좌측에 배치돼 있다.

민고당 옆을 지나 뒤편으로 가면 사당으로 이어지는 내삼문이 나온다.

명필 옥동 이서가 쓴 숭렬사우 편액이 걸려 있는 제향공간인 사당이 서원 강당 뒤편 언덕에 배치돼 있다.
용산서원 제사 때 제기와 음식을 보관하는 전사청
이에 따라 용산서원은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당 옆에는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와 제사 음식을 보관하는 전사청 건물도 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 동상
△충신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

용산서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모두 참전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정무공 최진립이 생애를 보낸 충의당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할 때 항상 첫손에 꼽히는 최부자 집의 원류가 충의당이다.

종택 입구에는 격조 있게 가꾸어진 소나무들과 파란 잔디로 잘 단장된 충의공원이 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추앙하기 위해 충의당공원에 마련된 기마동상.
소나무의 푸르고 정정한 기상으로 가득한 넓은 공원에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추앙하기 위해 마련된 기마동상이 우뚝 서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1568년(선조 원년)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와 평해황씨 사이에 셋째로 태어났다.

장군은 25세에는 임진왜란을 당해 아우 최계종, 당숙 최신린, 최봉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27세에는 갑오 무과에 급제했으며, 47세에 통정대부로 경원도호부사를 지냈다. 67세에 의흥위부사직과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는 등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한결같이 청백함이 알려져 나라로부터 여러 차례 칭찬을 받았다. 장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0세 노구로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전투를 계속하다가 순절했다.

장군에게는 자헌대부 병조판서 벼슬이 내려졌고, 정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청백리로 뽑힘과 아울러 용산서원에 제향과 ‘충렬사우’라는 사액까지 내려졌다.

충신의 사후, 제사 때마다 나라에서 제문과 제물을 보내어 그 공을 치하했다.

인조대왕은 제문에서 ‘굳세고 절개 있음을 내가 흠모하고 청렴하고 부지런함을 흠모 한다’이라고 해 충절을 극찬했고 생가인 ‘충의당’의 동쪽 채에 흠흠당이란 당호가 있다.

불천위로 자손들이나 지방 유림에서 영원토록 제사를 모시고 흠향해 그 정신을 기리고 빛내어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용산서원 신도비각
△‘노블레스 오블리주’ 용산서원.

용산서원은 청백리로 기록된 임진왜란 때의 공신 잠와 최진립을 향사한 곳이다.

일부 학자와 전문가들은 사액서원으로 향사된 용산서원을 매우 특이하다고 여기고 있다.

최진립이 무반 출신이지만, 도학자들을 대상으로 승인되는 사액서원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이는 경주최씨 문중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과 사회적 힘을 알려 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액은 한 집안의 가격(家格)과 사회적 지위가 국가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조선 후기에 그것도 남인들의 근거지인 영남지역에, 더욱이 서원에 대한 다양한 억제책이 강구되던 당시의 정황에서 사액서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사실인 것이다.

용산서원에는 비교적 풍부하고 다양한 형식의 서원 고문서가 남아 있다.

자료들은 서원이 조선의 향촌사회에서 교육,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이 서원에서 작성된 많은 서목들은 다른 서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서원 내부의 움직임을 많이 담고 있다.

또한 이 서원에는 서원문서뿐만 아니라 남면향약 및 이조 동계 등 향촌의 사회조직을 보여 주는 자료가 다수 있다.

용산서원은 현재 경주 최씨 가암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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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환 기자 hgeeh@kyongbuk.com

동남부권 본부장, 경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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