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인문학] 다육이
[돌봄의 인문학] 다육이
  •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9년 05월 23일 18시 23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5월 24일 금요일
  •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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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최라라)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최영미(최라라)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다육이는 식물을 키우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라고들 한다. 사막으로부터 온 이것은 물을 자주 줄 필요도 없이 햇살 잘 드는 곳에 놓아두면 된다고 한다. 잎이나 줄기의 모양은 크게 보면 한결같은 듯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잎 하나도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잎이나 줄기, 뿌리 등에 물을 잘 보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육이는 다육이가 되었다. 그런데 다육이가 우리나라에 즐비하다.

다육이를 사러 갔을 때 화원의 주인은 한 달에 한 번씩만 물을 주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자주 물을 주면 뿌리가 썩어서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바심에 다른 화초와 똑같이 물을 주었고 어느 날 다육이의 잎들이 떨어져 베란다 바닥에 뒹구는 것을 발견했다. 다육이는 사막이라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물주머니로 최적화시켰는데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판단해버린 것이다. 나의 지나친 친절이 다육이를 다육이로 살지 못하게 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동안 다육이는 다육이로 살아왔다. 자신이 사막 아닌 곳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다육이는 간신히 제 잎을 부여잡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과보호가 자신의 잎을 붙잡고 있을 힘조차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환경을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린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위해 여러 번 이사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했으며 현대의 많은 부모들 또한 자식 교육을 위해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로 올수록 그 노력이 지나쳐 성인이 되고서도 아이들은 부모가 만든 물관 속에서 유유자적 살아가기가 일쑤다. 수술실에 근무하는 신규간호사의 어머니가 파출부를 보내줄 테니 자신의 아이에게는 청소를 시키지 말아 달라는 전화를 했다는 사건은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해프닝이다.

사람은 애초에 초식이었다고 한다. 좀 더 강한 힘이 생존에 필요함을 알게 되면서 잡식성이 되었을 것이다. 더 강력한 힘을 얻으려고 자동차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고 핵무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급변하는 현대의 문명에 잘 적응하여 다육이처럼 튼튼히 자라고 있는 중일까. 타인이나 부모의 물주머니를 필요로 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걸 보면 아직 최적화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사람들 사이가 건조한 걸 보면 오히려 사막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육이를 파는 화원들이 즐비하다. 사막이라는 말, 그 아련하고 막막한 곳으로부터 왔다는 다육이라는 식물, 그래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사막에 사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비가 오는 사막, 사계절 나무들이 푸른 사막, 어디서든 물이 솟고 신기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막…. 이런 환경을 두고 사람들이 사막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짚어보자면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사람들이 마음으로 만든 사막…. 그런데 우리는 사막에서 살 수 있도록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아이답게, 어른은 어른답게 온몸에 물관을 키워야 한다. 우리의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가기 전에 우리가 만든 사막으로부터 돌아와야 한다.

오늘 밤에는 다육이에게 사막에서 우리나라로 어떻게 왔는지 그 길이라도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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