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다음 이야기는 중국의 한 소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비유를 설명하려는 교사와 모택동의 교시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학생들이 벌이는 웃지 못할 갈등 장면입니다.


“은유란 하나를 다른 것과 비교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러시아 수정주의자들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실제로는 쓰레기가 아니지만, 마오(毛) 서기장님은 그들을 쓰레기라고 부르고 있어요. 바로 이것이 은유라는 거예요.”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가오 지앙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는 학급에서 가장 키가 큰 아이였다.

“질문이 뭐죠?” 웬리 선생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선생님은 러시아 수정주의자들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쓰레기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마오 서기장님께서는 분명히 쓰레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죠?”

웬리 선생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쓰레기가 아니에요.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그들을 쓰레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경멸하기 때문이에요.”

“그들도 인간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니우 펜이 대들었다.

“그, 그래요.” 웬리 선생이 말했다.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리 중 많은 수는 웬리 선생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아니, 틀린 것만이 아니라 반동적이기까지 했다. ‘하 진 ‘십 년’’


중국 문화혁명기의 초등학교 교실의 모습입니다. 갓 부임한 처녀 선생님은 은유를 가르치려다 사상이 불온한 반동분자로 몰려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그녀가 범한 죄는 일종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녀가 신성불가침의 대상인 절대자의 말을 비유로 해석한 것이 마오교(敎) 신도들이었던 학생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절대자의 말은 비록 비유로 사용되었어도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던 것입니다.

저도 이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대학에는 업적 평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저술한 저서나 연구논문 예술 발표작들을 양적(量的)으로 평가해서 등급을 매겨 성과급여에 반영합니다. 소설이나 시, 수필 같은 문예 창작물들은 ‘편당 20%, 전체 80% 이내’라는 평가 기준이 적용됩니다. 그러니까 소설가인 제가 아무리 많은 소설을 발표하더라도 논문 한 편의 80%만 그 업적이 인정됩니다. 제가 소속된 학과가 문예창작과가 아니므로 저는 그런 평가 기준에 전혀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신문에 실었던 칼럼들을 수필 창작 업적으로 보고했더니 인정할 수 없다는 회신이 왔습니다. 수필을 중수필과 경수필로 나눌 때 신문 칼럼은 중수필에 속하게 됩니다. 납득이 잘되지 않아서 왜 인정되지 않는가 라고 질의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걸작입니다. “전례가 없다(이전에도 한 번 기각된 적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듣기로 “수필가가 쓴 것만 수필로 인정한다”라는 말도 관계자 회의에서 나왔답니다. 이상의 ‘권태’나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같은 명작 수필들이 소설가들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만 그 회의에 참석했던 모양입니다.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주도하는 사회의 최고 규범은 <1. 비유를 용납하지 않는다.>와 <2.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 아픈 것은 참을 수 없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대접을 받으려면 그때그때 어중이떠중이 처신을 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게 아닌데요?”라고 나섰다가는 반동으로 몰리거나 공연히 자기 잇속만 밝히는 사람이 됩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골고루 퍼져 있는 어중이떠중이 의식들이 참 걱정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