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41. 안동 사빈서원
[서원] 41. 안동 사빈서원
  • 오종명 기자
  • 승인 2019년 05월 29일 17시 19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5월 30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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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가르침 들리는 듯
경원루
사빈서원은 의성김씨 중흥조 청계 김진(1500~1580)선생과 그의 다섯 아들(약봉·귀봉·운암·학봉·남악)의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 숙종 36년(1710)에 사림과 후손들이 건립했다. 그러나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가 지난 2011년 143년 만에 복원된 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89년 임하댐 건설로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로 이건 했다가 2007년 다시 지금의 임하면 천전2리로 옮겼다. 1985년 8월 5일 경북 지방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다.
박학독행: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자라는 뜻
현재 선비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도량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있다. 서원에 들어서면 입구의 넓은 터와 함께 삼 문 경원루(景遠樓) 좌측에 박학독행(博學篤行·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자)이라는 글귀가 큰 돌에 새겨져 있다.
강당인 흥교당
건물은 앞편 6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강당 흥교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머물던 동·서재를 복원하여 강학공간을 이루고 있다. 뒤편에는 청계 김진과 다섯 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경덕사를 최근에 건립했다.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용도로 강당과 함께 고종 때 중건한 주사는 앞면 5칸, 옆면 5칸의 전형적인 안동지역 한옥 형태를 하고 있다.
사빈서원 현판
사빈서원은 임하 보조댐과 천전마을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비교적 높은 곳에 있다. 2011년 현재 위치로 옮겨 강당·주사를 이건 하고 사당, 동재, 서재, 전사청, 누각을 새로 지었다. 현판은 퇴계 선생의 종손 이근필 씨가 썼다.

청계 김진
△청계 김진의 유훈과 다섯 아들

청계는 망계 김만근의 손자로 병절교위를 지낸 김예범의 아들이다. 1525년(중종20)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서 김인후 등 명사들과 교우하였고, 그 후 천전에 서당을 열어 자녀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강릉과 영양 등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을 창건했다.

조부인 망계 김만근이 내 앞으로 입향한 이래 기반을 다져오다가 청계 때에 이르러 가문이 활짝 열렸다. 청계는 다섯 아들을 두었다. 약봉 김극일, 귀봉 김수일, 운암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 김복일이다. 5형제는 모두 퇴계의 제자가 되었고, 그 중 3형제(약봉, 학봉, 남악)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운암과 귀봉은 소과에 급제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 집안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칭송하기도 하고, 다섯 형제는 의성김씨 오룡(五龍)으로 불리기도 했다.

훗날 사빈서원에서 청계를 주벽(主壁)으로 그 아들 5형제를 제향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6 부자가 한 서원에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

청계는 일찍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오직 부모 봉양과 자손 교육을 통해 영광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 결실로 6 부자가 사림(士林)의 존숭을 받게 된 것이다. 전하는 일화에는 어느 도사가 청계에게 살아서 참판(生參判)보다는 죽어 판서로 증직(贈判書)됨이 나으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훗날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이 벼슬로 인해 청계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됐다.

청계는 “신하가 된 사람은 훌륭한 일을 위해 명예롭게 죽을지언정 떳떳하지 못한 삶으로 신명을 보존함은 옳지 않다. 너희들은 군자답게 죽는다면 오히려 살았다고 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오히려 죽은 것으로 보겠다”는 유훈을 자식들에게 남겼다.

약봉 김극일(1522~1585)은 청계의 8남매 중 장자로 1546년(명종 원년) 문과에 급제해 현감, 군수, 목사, 부사 등을 역임했다. 1581년 60세 사헌부장령에 내자사정을 마지막으로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귀봉 김수일(1528~1583)은 1558년(명종 13)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집 서쪽에 백운정(白雲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학문과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그는 경노에 정성을 다할 것, 치가(治家)는 법도에 맞게 할 것, 봉제사(奉祭祀)는 예에 준할 것, 집안이 화목할 것 등 4칙을 자손에게 훈계로 남겼다.

운암 김명일(1534~1570)은 일찍부터 자연을 좋아해 부친이 도연(陶淵)이라는 곳에 선유정(仙遊亭)이라는 정자를 지어주었다. 여기서 여생을 즐기려 했으나 병약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운암(雲巖)’이라는 호는 자신이 살던 추월리 상류에 있던 운건암이라는 바위 이름에서 딴 것이다.

학봉 김성일(1538~1593)은 1563년 진사시 합격, 1567년 4월 중광향시 합격, 6월 문과급제 등을 거쳐 두루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임금 앞에서 바른말을 서슴없이 하는 강직한 선비였다고 한다. “유가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안동 지역의 속담을 몸소 실천한 분이다.

퇴계는 일찍이 넷째 아들인 학봉을 “행실이 훌륭하고 학문이 정밀하니 나의 눈에 그를 견줄 이를 보지 못했노라”라고 평했다. 학봉의 학통은 경당 장흥효→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 등으로 전해 내려갔다. 선조실록에는 서애 류성룡,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을 퇴계 문하의 삼영수(三領袖)로 꼽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나자 싸움터에 직접 나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을 이끌고 얼마 후 과로로 죽는다. 1679년(숙종5)에 문충 시호가 내려지고 학봉종택 불천위로 모셔졌다. 안동의 임천, 호계, 사빈서원과 영양 영산, 의성 빙계, 청송 송학, 하동 영계, 나주 대곡, 진주 경림서원에 제향됐다.

남악 김복일(1541~1591)은 1564년 사마시에 합격 1570년(선조 3년) 문과급제 하였고 군수, 부사 등을 역임했다. 오리 이원익과 한강 정구 선생이 그 처사를 두고 ‘절행이 금세에 이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찌 가당하다고 하랴’고 칭송했으며, 사빈서원과 예천 봉산서원에 제향되고 후손들이 금당실을 지키고 있다.
동재인 진수재
서재인 존양재
사당인 경덕사
흥교당 내부
경원루에서 내려다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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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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