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자유기고가
이상철 자유기고가

‘연습생’을 우리나라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 하고 있다. ‘기술이나 지식 따위를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히는 사람’.

말이 쉽지,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또한 그 결과가 언제나 좋은 것만이 아닌 것이 세상 이치임을 알게 될 때 그 번뇌의 시간은 어떠한가?

‘연습’은 무한 반복하는 그 단조로움을 극복하여야 하며, 몰입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시간을 죽이는 쓸모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연습이라는 시간을 극복하고 무명의 연습생이 화려한 스타로 다시 태어날 때 우리는 이것을 ‘연습생 신화’라고 부르며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연습생 신화’를 떠올리면 전 프로야구 선수 장종훈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고교 졸업 후 프로지명을 받지 못하고 가정형편 상 대학진학마저 포기한 그는, 입단 후 시합은커녕, 선수들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틈날 때마다 훈련에 매진하였다.

그 후 주전 선수의 부상으로 우연히 기회를 잡게 된 장종훈은 국내 최초의 40홈런 시대를 열고, 유격수-1루수-지명타자의 3개 포지션에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이후 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이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제2의 장종훈을 꿈꾸게 되었다.

연습생 신화는 스포츠 선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K-POP은 한류를 넘어 세계 음악의 주류가 되어 많은 한류 스타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한류스타의 수백 배, 아니 수천 배 이상의 연습생들은 데뷔도 하지 못하고 이름 없는 연습생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렇듯 별처럼 빛나는 스타라는 이름엔 반드시 ‘무명’이라는 어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면 퍽 슬픈 일이다. ‘연습’이라는 어둠의 터널을 이겨내고 마침내 빛나는 별로 태어난 스타의 얘기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중학생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연습생 시절은 고단의 연속이었다. 다리 부상으로 1년 동안이나 춤을 출 수 없는 시기도 있었고, 데뷔도 후배에게 뒤처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연습생 시절에도 학교성적은 전교 50등 안에 들 정도로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경쟁률이 치열한 한국예술종합학교도 단번에 합격했다고 한다.

멤버 중 가장 긴 연습생 생활은 물론이고, 후배들에 뒤처져도 결코 노력을 멈추지 않은 7년…. 마침내 그는 2012년, ‘엑소(EXO)’의 멤버로 데뷔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수호’이다.

최근엔 뮤지컬 배우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그는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와 ‘웃는 남자’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줘 한국 뮤지컬계의 기대주로 우뚝 섰다. 그리고 올해 제13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의 홍보대사를 맡았다. 아마도 그는 세계 최고의 뮤지컬 배우로 우뚝 설 그 날까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연습생 시절을 잊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시대의 청춘들은 지금 정규직은 고사하고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자리도 얻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공립도서관에서 취업공부를 하고, 동전노래방에서 노래 연습을 하고, 운동장에게 쉼 없이 배트를 휘두르는 이 시대의 청춘들은 어쩌면 모두 연습생일 것이다.

‘미생’이 공정한 기회를 얻고 또, 정당한 노력에 의해서 ‘완생’이 되는 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지금도 피나는 노력을 하는 이 시대의 ‘연습생’들에게 응원과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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