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우리나라 거대 보수정당의 정치의식 수준이 이 정도였던가. 저급한 막말 정치는 부끄럽긴 해도 개인적 자질 문제로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외교 행위를 국익 차원이 아닌 정쟁의 도구쯤으로 가벼이 여기는 정당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것도 국가기밀로 분류된 국가 정상 간의 통화내용을 한낱 정당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으니 답답할 지경이다. 통화내용이란 것도 이웃 나라 방문 길에 자국에 들러주길 요청하는 통상적인 외교 수준이고 보면 폭로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다. 그럼에도 국민의 알 권리라느니, 공익제보라고 우기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심지어 외교기밀 누설이 야당의 당연한 정치적 행위라는 궤변까지 터져 나왔다. 과연 공당(公黨)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따져보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 18대 대선 과정에서 지금 제1야당의 전신인 당시 집권 여당은 전 정권의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무단으로 입수해 이를 선거에 이용한 적이 있다. 대통령 지정기록물로 분류돼 일반인 열람이 불가능한데도 아무런 권한도 없는 선거 캠프 관계자들이 불법적으로 그 내용을 공유하고 누설했음이 나중에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그리고 회담 내용 역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물론 선거에서 승리한 뒤의 일이다. 이번 한·미 정상 통화내용 유출을 단순한 정치적 실수로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국가 간 상호신뢰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국제외교 관계에서 기밀로 다루어져야 할 내용들이 자국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단으로 이용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가. 오죽하면 동료 의원이나 같은 보수진영의 외교전문가조차 비난하고 나섰을까. 따라서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법과 원칙에 따른 응분의 대가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아마도 지난 2007년 대선 과정에서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유출과 기밀 누설이 마땅한 처벌로 제대로 마무리되었더라면 이번 같은 일은 또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올해로 집권 3년 차를 맞는 현 정부에서 관료들의 일탈(?)이 유난히 두드러지고 있다. 이번 정상 통화내용 유출 역시, 현직 외교관이 학교선배 정치인의 부탁으로 이루어진 거로 알려지고 있다. 앞서 기획재정부 소속 한 공무원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통화정책을 시행하라는 정부의 압력이 있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또한 청와대 민정비서실 산하 감찰 공무원은 민간인 사찰을 지시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직 공무원들의 제보가 공익차원인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당연히 신중하게 따져봐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우리 관료사회가 정치적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거라면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관료는 그의 본래적 사명에 따르면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단지 ‘행정’만 하게 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비당파적 자세로 행정을 해야 한다’고 막스 베버는 말했다. 그리고 이는 ‘국익’에 반하는 것이 아닌 한, 정치적 행정 관료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행정 관료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 비서관이 전 정권의 정상회담 회의록을 같은 진영에게 유출시키고, 비정치적으로 ‘행정’에 충실해야 할 관료가 개인적 친분을 이유로 국가 정상 간 통화내용을 알려주는 지금의 우리 관료사회를 정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관료사회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마땅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민생탐방 전국투어를 마치고 지난 주말 서울집회에 참석한 제1보수야당 대표는 ‘국민들이 살려달라고 절규하고 있다’며 민생투어 결과를 밝혔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지진피해로 무너져 내린 지역경제 때문에 아직도 죽을 지경인 우리 지역민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맞는 말이다. 그래서 한 푼의 추경예산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그런데 말로는 민생우선을 외치면서도 차기 총선에서의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방안에 골몰하느라 현재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있는 유일한 정당이 제1보수야당 아닌가. 정말 이래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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