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장사리 기습상륙작전

1950년 9월 14일 장사리 기습상륙작전이 감행되자 문산호에서 장병들 이 상률작전에 투입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은 T-35탱크를 앞세우고 기습남침을 감행하여 삽시간에 38선과 수도 서울을 점령하면서 남침을 계속했다. 그해 7월 아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인 포항과 영천까지 밀리게 되고, 서쪽은 낙동강과 인접한 마산과 부산 정도만 남겨둔 채 인민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8월에는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끝에 있는 영덕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3사단이 후방을 차단당함에 따라 8월 16∼17일 해상철수를 단행, 포항 남쪽 형산강을 경계로 인민군과 대치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일시에 적을 섬멸하기로 계획하고 서해와 동해를 이용, 상륙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인민군의 중요 보급로 차단을 위해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적의 이목을 동해안으로 돌리게 할 목적으로 기만전술을 펼치기로 했고, 그것이 장사리 기습상륙작전이었다.

영덕군이 발간한 ‘장사상륙작전’ 자료에 따르면 그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는 포항 북쪽의 좁은 해안에 있는 어촌으로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이곳에서 인민군은 해발 200m의 남쪽 지경리 고지와 북쪽 부흥리 고지를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14일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문산호.
장사상륙작전은 적의 이목을 돌리려는 전략 외에 북한 인민군 제5사단 및 제2군단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해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도 목적이었다. 한국 육군은 1개 대대 규모의 유격대를 해상으로부터 장사리 해안에 투입하고 이 부대에 ‘국군 제3사단이 포항 남쪽에서 공격을 개시할 때 적의 후방을 교란하도록 한다’는 임무를 주었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을 통제하던 극동 미군사령부를 거쳐 부산에 있는 한국 해군의 수석고문과 미군 루시 중령에게 지원지시가 내려졌고, 이 작전을 위해 이명흠 대위가 지휘하는 독립 제1유격대대가 차출됐다. 이 부대는 육본 계엄민사부 동원과장이었던 이 대위가 대구역 광장에서 3일간 마이크를 잡고 직접 모집한 학생 212명과 밀양에서 이미 모병된 학생 및 청년 560명이 합해져 총 772명으로 구성됐다.

이 대위의 이름을 딴 일명 ‘명부대’라고도 불리는 이 유격대는 8월말쯤 경남 밀양에서 편성됐으며 대부분이 보름 정도의 훈련만 받은 ‘학도병’이었다. 거의 영남지역 학생으로, 이 중 80%에 해당하는 600여명이 18∼19세에 불과했고 심지어 15세의 어린 학생도 일부 포함됐다.

주로 중·고등학생인 이들은 1950년 8월 27일 편성 당일부터 체력과 정신교육 위주로 교육을 받았으며 정식군번이 없는 ‘육본직할 유격대원’이란 대원증만 지급 받았다. 무기가 없어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장비로 훈련을 받았고 유격훈련조차 2주일을 채우지 못한 가운데 ‘육본 작전명령 제174호(1950.9.10.)’로 출동명령이 하달됐다.

육군본부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은 명부대장에게 “인천상륙작전에 모든 정규부대가 동원되었기에 이 작전을 감행할 가용병력이 없어 유격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엔 강력히 반대하던 이 대위도 육본의 결정사항을 듣고 막내 동생과 같은 어린 학생을 사지(死地)로 보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많이 괴로워 했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오전 독립제1유격대대는 부산의 육본연병장에서 한국 육해공 총사령관 정일권 소장과 다수의 군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정식을 거행했다. 이들 전원은 출동에 앞서 각자의 머리카락, 손톱, 발톱의 일부를 자른 뒤 봉투에 넣어 육본에 보관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작전지역으로 출동한 것이었다.

장비가 없는 것은 물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학도병이 대부분인 독립제1유격대대였지만 정신력과 사기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9월 14일 오후 4시쯤 부산항 제4부두에서 2천700t급 LST 문산호(대한해운공사 소속)에 승선했다. 출발 당시 승선인원은 이 대위 이하 유격대대 772명과 문산호 선장 황재중 등 선원 42명, 그리고 미군 장교와 하사관 2명, 육본파견 제51통신대 통신병 12명 등 총 841명이었다.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바람이 세차고 파도가 높았지만 문산호는 미 해군 구축함 엔디코트함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을 떠나 장사리로 향했다. 9월15일 오전 5시 무렵 유격대원을 태운 문산호는 상륙목적지인 장사리 해상 4㎞ 떨어진 곳에 도달했지만 짙은 안개와 거친 파도로 인해 해안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때 북한군이 부흥리 고지와 지경리 고지에서 문산호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해왔다. 이 과정에서 적의 포탄이 선장실을 뚫고 들어와, 선장실 기기와 주요 기관부가 파손됐고 사상자도 일부 발생했다. 이 때문에 문산호는 순식간에 적의 화력권에서 벗어날 수도, 백사장으로 접근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명부대장 이 대위는 7명의 특공조를 차출, 백사장에 있는 소나무에 밧줄을 매도록 지시했다. 상륙을 시도하던 몇 명의 대원이 5∼6m에 달하는 파도에 휩쓸려 희생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지만 미 구축함의 포격에 힘입어 4조의 밧줄로 문산호와 해안지점을 잇는 데 성공했다.

대원들은 해안 약 30m 거리에서 로프를 이용해 상륙을 시도했다. 적은 이때부터 집중사격을 가했고 학도병의 희생도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면에 있는 적의 초소와 좌우의 높은 고지에서 맹렬히 쏘아대는 적의 사격망을 뚫고 상륙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문산호는 거친 파도와 적의 집중포격으로 오전 6시경 암초에 쐐기처럼 단단히 박혀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이 대위의 상륙명령에 따라 빗발치는 사격망을 뚫어낸 대원들은 마침내 오전 9시무렵 상륙을 완료했다. 필사적인 사격전이 전개된 상륙작전에 장사리 새벽 해안은 불빛과 소음, 그리고 포연으로 가득 찼고 이 과정에서 일부 대원은 강한 파도에 휩쓸려 희생되기도 했다.

당시 유격대 부관이었던 백운봉씨는 “상륙과정에서 60여명이 전사하고 9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회고했다. 상륙에 성공한 유격대는 현역 이상의 투혼을 발휘, 6일간의 치열한 교전을 통해 장사리 일대 인민군 소탕과 고지점령, 교두보 확보 및 보급로 차단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결과적으로 인민군 제5사단과 제2군단의 주력부대와 전차 4대를 동해안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9월 19일 오전 6시. 부산에서 급파된 해군수송선 LST 조치원호가 현장에 도착, 철수가 시작됐다. 유격대원들은 구명대에 5∼6명씩 나눠타고 육지로부터 연결된 로프를 잡고 조치원호까지 이동했는데, 이때 잔존해있던 적의 사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날 오후 3시까지 철수는 계속됐으며, 다음날 오후 8시쯤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철수병력의 엄호를 위해 남아있던 제5대대 병력 39명은 적의 포로가 됐다.

부산항에 도착한 독립제1유격대원들은 9월 21일에서야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됐다. 장사상륙작전으로 아군은 어린 학생 139명의 생명을 잃었으나, 북한 인민군은 27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대원들은 영주초등학교에서 주둔하던 중 1950년 10월 5일 입대명령과 함께 036군번을 전달받고 그해 11월 양주와 홍천 등지의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했다.

최길동 기자
최길동 기자 kdchoi@kyongbuk.com

영덕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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