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6주기 추모 자리에 많은 분이 함께 통일의 노래 이어 부르길…

맹문재 시인·안양대 교수

어느덧 우리 사회는 오랜 분단 상황에 익숙해져 통일에 대한 열망이 줄어들고 있다. 통일을 하면 좋겠지만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이 매년 시행하는 통일 의식 조사에서 여실하게 확인된다. 2017년까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점점 줄어들어 전체 인구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평생 통일을 노래한 이기형 시인의 시 세계는 주목된다. 시인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통일 문제를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일관되게 노래했다. 시인은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으로 함흥고보와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를 졸업했다. 1943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지하협동사건’ 및 ‘학병거부사건’ 등 항일 투쟁으로 피검되어 1년여 간 복역했다. 해방 뒤에는 ‘동신일보’, ‘중외신보’ 등의 기자로 일했고, 1947년 ‘민주조선’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1947년 정신적 지도자로 섬겨온 몽양 여운형이 서거하자 시작 활동은 물론이고 일체의 공적인 사회 활동을 중단했다. 진리와 신념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몽양이 없는 분단된 조국에서는 고결한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 칩거 기간이 장장 33년간이나 되었다.

몽양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해 미소공동위원회가 협상할 때 자주적 통일을 추구했다. 소련은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좌익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고, 미국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의 입장을 고수하자 좌우합작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남쪽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익은 몽양을 매국노로 규탄했고 끝내 암살했다. 몽양은 좌익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국 몽양을 비롯해 김규식, 김구의 좌우합작 운동은 힘을 잃었고 남북 분단은 고착화되고 말았다. 

이기형 시인은 1980년대에 들어 분단이 고착화되는 현실을 가만히 볼 수 없어 시를 쓰지 않겠다던 그동안의 결심을 바꾸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간절히 부르며 통일을 노래했고, 재야 민주화 통일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1982년 첫 시집 ‘망향’을 간행한 후 타계할 때까지 10권의 시집을 남겼다. 몽양이 추구했던 자주적 조국 통일 운동을 온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이기형 시인의 6주기(6월 12일)가 다가온다. 필자는 시인의 장례식장에서 조시를 낭독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추모 모임을 가져왔다. 올해도 많은 분들이 추모의 자리에 함께해 시인이 부른 통일의 노래를 이어 부르기를 기대한다.

몽양(夢陽)의 서거 후 삼십삼년 간 칩거했다가
전위대로 나섰지요
분단 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생이별한 어머니와 처자식을 품기 위해서였지요
아버님의 퉁소 소리와
함흥의 꽃섬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지요
진리와 신념 앞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던 스승을
섬기기 위해서였지요

단심(丹心)의 시인은 거칠 것이 없었지요
함흥에서의 야학으로
일본에서의 고학으로
항일 투쟁으로 쌓은 강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민주화 운동이며
통일 운동을
아름다운 산하에 펼치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지리산을 오르고
바다제비를 바라보고
별 꿈을 꾸었지요
봄은 왜 오지 않느냐고 원망하면서도
독립문에 나아갔고
삼천리 통일 공화국을 노래했지요

통일만이 살 길이라고
꿈속에서도
절정의 노래를 불렀지요

-맹문재 ‘전위의 시인-이기형 선생님께’ 전문.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