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달마대사는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집이나 사무실에 달마의 초상화를 걸어두면서 복을 기원한다. 현대에 들어 악귀소멸이나 수맥차단의 목적으로 다수의 달마도가 제작 주문되고 있다. 이는 달마의 생김새가 기괴하고 그의 행적이 초인적이라 무수한 설화들이 현대의 상술과 적절히 결합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후기의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와 김홍도가 그린 ‘절로도해도’가 달마도로 유명하다.

달마는 중국 선종의 초조이다, 달마의 선법은 2조 혜가-3조 승찬-4조 도신-5조 홍인-육조 혜능으로 법통이 전승되어 현재의 한국의 조계종과 법맥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달마에 관한 이야기들은 후대에 꾸며진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다. 달마는‘낙양가람기’의 육로설과 ‘속고승전’과 ‘보림전’ 및 혜능의 제자인 하택 신회의 주장에 의해서 해로로 중국에 왔다는 설이 있는데, 해로로 와서 양무제를 만난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양무제와의 선문답으로. 양무제가 달마를 죽였으나 무덤에 신발 한 짝만 있더라는 환생설, 2조 혜가가 왼쪽 팔을 잘라 제자가 되었다는 혜가단비(慧可斷臂), 소림굴에서의 9년간 면벽수도를 위해 속눈썹을 던져 차밭이 되었다는 전설 등은 달마의 전기에는 분명하지 않다. 광저우의 광효사 경내의 달마정과 서래초지 및 허난성 덩펑시(등봉시)의 소림사와 달마동이 달마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달마의 법을 이은 2대 조사는 혜가(慧可·487~593)이다. 그는 눈 속에서 왼팔을 절단하면서까지 구도(求道)의 성심을 보이고 인정을 받았다는 전설로 유명한데, 사실은 그는 북주 무제의 폐불(574~579)을 만나 담림과 함께 팔이 잘리는 비운을 당한다. 혜가는 달마로부터‘이입사행론’과 모든 존재에게 여래의 가능성이 있다는‘능가경’4권을 전수 받는다. 3대 조사는 승찬(僧璨·? ~ 606) 이다. 승찬은 안후이성 안칭시 첸산현의 천주산 삼조사(三祖寺)의 삼조동에서 선(禪)의 요체를 146구(句) 584자(字)의 사언절구로 풀이한 명문장인 ‘신심명(信心銘)’을 남겼는데, 삼조사는 사리를 모신 각적탑이 세워져 있다.

4조 도신(道信·580~651)은 후베이성 황강시 황매현 쌍봉산(雙峰山) 사조사에서 30여 년간 주석하셨다. 그곳에서 법을 펴고 제자들을 이끌었는데, 이를 동산법문(東山法門·5조 홍인의 사상까지 아울러 동산법문이라고 함)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승려들은 두타행(頭陀行)에서 교단을 형성하여 수행하기 시작했다. ‘도신의 탑’으로 불리는 자운탑이 사조사 내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 전래자 신라의 법랑(法朗)은 4조 도신의 법을 받았다고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전한다. 법랑의 제자인 신행(神行·704~779)은 대통 신수(大通神秀·606~706)의 제자인 보적(普寂·651~739)의 제자가 되는 지공(志空)을 만나 북종선을 전수받아 준범-혜은-지증대사 도헌으로 법맥이 이어진다. 이 산문이 우리나라 대표 선원인 문경 봉암사 희양산문이다.

5조 홍인(弘忍·601년~674년)은 중국 선종의 실제적인 확립자로서, 그는 쌍봉산의 동쪽인 동산에 머물러, 그의 법문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한다. 홍인은 ‘능가경’을 버리고 반야사상의 경전인‘금강경’을 핵심경전으로 취한다. 그의 문하에 500명이 넘는데, 그중 북종선(北宗禪)의 신수(神秀)와 남종선(南宗禪)의 혜능(慧能) 등 10대 제자를 배출하였다.

당대에는 북종선의 신수가 홍인의 대표제자였으나 하택 신회(荷澤神會·670~762)가 등장하여 혜능 선양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입지가 바뀌게 되어 혜능의 남종선이 주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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