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아버지와 아들’은 소설가들이 즐겨 다루는 소재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문열의 ‘금시조’, ‘시인’,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 ‘개흘레꾼’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버지와 딸’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과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여성 소설가를 당당하게 정상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명작들이었습니다. 남녀 불문하고 소설가들에게는 그만큼 아버지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김소진의 ‘개흘레꾼’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개흘레꾼’은 그 흔한 ‘아버지 소설’ 중의 하나이지만 그리 흔치 않은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고향이 이북인 아버지는 6.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동지들의 돈을 맡아두는 금고 역할을 하다가 큰 봉변을 당합니다. 어디든 있는 ‘개 같은 놈’들로부터 그 돈을 지키려다가 ‘남자의 물건’을 성난 개에게 물어뜯기는 참혹한 린치를 당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버지는 반공포로로 세상에 나온 뒤 그저 남루하게 살면서 취미로 개흘레꾼을 자임합니다. 발정 난 개들의 짝을 지어줍니다. 그것이 개에게 당한 자신의 ‘상처’를 위무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못된 개에게 물려서 세상을 뜹니다(그렇게 ‘나의 기억’이 조작됩니다). 이 이야기가 흔치 않은 ‘아버지 소설’인 것은 우리 역사가 만든 ‘아버지의 곡절 많은 인생’ 때문이 아닙니다. 소설가의 아비치고 그 정도의 곡절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김소진의 소설이 유별난 것은 ‘아버지와 함께 부대낀 세월’에 대한 묘사가 특별히 곡진하다는 부분에 있습니다.

...그날 나는 아버지가 개흘레꾼이었다는 얘기를 명숙이에게 다 해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내가 받아야 했던 마음의 상처와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그러나 그다음 얘기는 그때 하지 않았다. 그토록 뻗치는 취기 속에서도. 아버지가 결국은 개에 물려 죽은 것 말이다. 그 개는 아랫마을에서 족방(수제 구둣방)을 하는 이차랑씨네 셰퍼드였다. 족방 일꾼들이 먹다 남긴 짬밥을 얻어먹어서 그런지 뒤룩뒤룩 살이 찐 데다 묶어놔 길러서 성질마저 포악한 놈한테 아버지가 왜 접근했는지 몰랐다. 아무튼 아버지는 정강이뼈가 허옇게 드러날 만큼 된통 물려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인수약국에서 약까지 지어 먹었다. 그러나 그 뒤로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는 기미를 보였다. 상처보다는 마음이 더 놀란 탓이었다. 물론 돌아가신 당일에 입맛이 당긴다며 잘못 먹은 찹쌀떡이 얹혀 급체 증세로 갑자기 숨을 거두긴 했으나 난 왠지 아버지의 운명이 개에 물려 죽을 팔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소진, ‘개흘레꾼’ 중에서’

김소진은 개흘레꾼의 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의 소설 안에서 소상히 밝힙니다. 그 안에서 아버지의 ‘개 사랑’이 결국은 ‘개 같은 세월’에 대한 자기 방식으로서의 ‘처방과 위무’였음을 그려냅니다. 김소진 소설이 아니더라도 아비는 아들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정체성 서사를 화제로 삼는 모든 소설에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비 없는 자식’은 그 무엇으로도 행세할 수 없는 것이 ‘땅 위에서의 삶’입니다. 자기 이름을 지니고 세상을 살고 싶은 자들은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디서든 ‘행세하고 남 앞에 서고 싶은 자’들은 반드시 그 문제의 해답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내야만 합니다. 나라가 많이 어수선합니다. 가짜 개흘레꾼들이 너무 설쳐대는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상처나 우려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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