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와 타협않는 절개와 의리 올곧은 선비정신 곳곳에 서려

섬계서원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양지마을 섬계천(봉곡천)변에 있는 섬계서원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02년(순조2) 지방 사림이 주동이 되어 창건했다.

서원 이름을 섬계(剡溪)라 한 까닭은 이 마을 이름이 섬계리(剡溪里)였던 데서 비롯된다. 지금은 조룡리로 바뀐 섬계리는 김문기를 중시조로 하는 김녕김씨 집성촌이다.

성균관대사성 이노춘(李魯春)이 쓴 상량문과 1898년 송근수(宋近洙)가 쓴 백촌선생원허비(白村先生院墟碑)에는 김문기와 그 맏아들 여병재(如甁齋) 김현석(金玄錫)을 추모하고자 세웠던 섬계사(剡溪祠)가 섬계서원의 뿌리였음을 밝히고 있다.
백촌선생원허비
1866년(고종3)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자 1898년에 그 자리에 백촌선생원허비를 세웠다. 이어 1914년에 강당인 경의재(景毅齋), 1961년 사당 세충사(世忠祀), 1996년 동별묘(東別廟)를 복원했다.

섬계서원은 김문기가 신원(伸寃)되고 관작(官爵)을 회복한 후 최초로 그를 배향해 세운 서원이다. 김문기의 행적을 정리한 백촌선생실기(白村先生實記)에 의하면, 백촌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서 세거(世居)했지만, 단종 복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그의 후손이나 종족으로 지례(知禮)로 옮겨 거주하는 이가 많았다.

섬계서원은 이렇게 형성된 김녕김씨 집성촌이 그 중시조를 기리고자 창건한 사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7년 12월 31일에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160호로 지정됐다.

섬계서원 현판
◇입지환경과 건물배치

섬계서원은 비봉산에서 흘러내린 당산(堂山) 자락에서 섬계천을 바라보고 앉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으로 경내는 강당과 사당 구역으로 대별되며 경내로 진입할수록 표고가 높아진다.

서원건축의 배치구성은 향교의 기본양식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영향을 받아 대게 앞쪽에 강당공간, 뒤쪽에 제향공간을 배열했는데 섬계서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당인 세충사를 강당인 경의재와 일렬로 배치하지 않고 강당 뒤 동쪽으로 치우쳐 앉아 비대칭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향교의 획일적인 배치양식에서 벗어나 제한적이나마 사립학교로서의 자율성을 엿볼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섬계서원 터를 물색할 당시에 이미 1400년대에 식재돼 고목으로 있던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앞쪽에 강당을, 왼편에 사당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건물배치는 외삼문을 대신하는 유의문(由義門)과 강당인 경의재, 전사청, 강당 우측 후면으로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세충사와 동별묘가 있다. ‘금릉승람’에 따르면 1802년 창건 당시에 외삼문을 겸한 상설루(賞雪樓)라는 누각이 강당 앞에 있었다고 하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고 전해진다.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인 경의재
△경의재(景毅齋)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인 경의재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퇴집으로 물익공 팔작지붕구조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를 놓고 좌우로 1칸짜리 온돌방을 넣었으며 대청 뒤로는 판문을 달았다.

방 앞쪽으로도 툇간을 만들고 툇마루를 깔았는데 대청과 툇마루 사이에 분합문을 달아 용도에 따라 들거나 내릴 수 있도록 했는데 분합문 위쪽 인방부분에 아(亞)자형 창을 낸 것이 특징이다.

별도의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서까래를 노출한 연등 천장이며 대들보와 종보사이 공간에 문을 달아 벽장으로 사용했으며 3개의 대들보 중 온돌방 방면의 2개는 종보와 종도리,장혀 사이에 사다리형 판대공으로 결구시켜 놓고 가운데는 파련대공을 사용했다.

1866년 헐렸다가 1914년 ‘섬계강당(剡溪講堂)’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세충사. 섬계서원 제향공간의 중심인 세충사는 창건당시에는 섬계사(剡溪祠)였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61년 복원됐다.
△세충사(世忠祠)

섬계서원 제향 공간의 중심인 세충사는 창건 당시에는 섬계사(剡溪祠)였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61년 복원됐다.

백촌 김문기를 주벽으로 하고 맏아들 영월군수 김현석(金玄錫)을 배향하며 향사는 원래 봄과 가을 두 차례 봉행하다가 십수 년 전부터 3월 중정일(中丁日)에서 가까운 주말 하루를 택해 한 번만 지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익공 맞배지붕으로 앞쪽에 툇간을 내고 양 측면에 심벽을 세운 후 툇마루를 깐 전퇴집이며 금단청으로 장식했다.

자연석기단을 3단으로 쌓고 자연주초를 놓은 후 원주를 세웠다.
삼현별묘. 세충사 좌측에 자리한 삼현별묘는 동별묘라고도 했는데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 일컫는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 남계(南溪) 서즐을 추가로 배향했다.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세 분의 위패를 세충사에 함께 모셨다가 1961년 경상북도 도비 5000만원을 지원 받아 복원했다.
△삼현별묘(三賢別廟)

세충사 좌측에 자리한 삼현별묘는 동별묘라고도 했는데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 일컫는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 남계(南溪) 서즐을 추가로 배향했다.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세 분의 위패를 세충사에 함께 모셨다가 1961년 경상북도 도비 5000만 원을 지원받아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민도리집 맞배지붕으로 모로단청으로 장식했다.

△기타 부속물

▷원허비(院墟碑)

섬계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1898년 엣 서원 터에 원허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은 송시열의 8대손으로 고종 때 대사헌과 좌의정을 지낸 송근수(宋近洙)가 지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례현(知禮縣) 남쪽 20리 되는 곳에 옛날 섬계사(剡溪祠)가 있었다. 이곳은 단종을 위해 순절한 백촌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그의 아들 현감 김현석(金玄錫)이 배향되어 있었다. 지금의 왕 병인년[1866(고종 3)]에 조정의 명령으로 철거되자 공의 자손들이 그곳이 황폐화되는 것을 보다 못해 단을 세운 다음 이번에 비석을 세워 공의 일을 드러냈다. 공의 이름은 문기(文起)이고 본관은 김녕으로, 백촌은 호이다. 선덕(宣德) 병오년[1426(세종 8)] 생원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문과에 급제하여 세 왕을 모셨다. 관직은 판서까지 올랐다. 세조 병자년[1456(세조 2)] 사육신과 연루되어 사형을 받은 사람이 30여 명이었는데 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들 김현석도 같은 날 목숨을 잃었다. 영묘(英廟) 신해년[1731(영조 7)]에 비로소 관작이 회복되었고, 정조 무술년[1778(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런 일의 전말이 모두 실려 있는 유사(遺事)가 간행되어 세상에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보태지 않았다.”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수령이 600년에 달하는 거목이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밑둥에 불이 붙은 것을 한 노파가 호미로 긁어 껐다고 한다.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수령이 600년에 달하는 거목이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밑둥에 불이 붙은 것을 한 노파가 호미로 긁어 껐다고 한다. 이 나무의 소유권을 두고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은행나무가 향교나 서원 등 조선 시대 유교 관련 교육 시설과 관련이 있다는 김녕김씨 문중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섬계서원 소유로 결정이 났다.

▷유의문(由義門)

창건 당시에는 송설루(松雪樓)라는 문루가 있던 자리인데 훼철될 때 헐린 후 복원되지 못하다가 1914년 강당을 복원할 때 유의문이라는 이름의 홑문으로 세워졌다.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1991년 동별묘를 복원할 때 현재와 같이 개축했다.
불이문. 강당과 사당을 연결하는 솟을삼문으로 1991년 동별묘를 복원할 때 개축했다
▷불이문(不二門)

강당과 사당을 연결하는 솟을삼문으로 1991년 동별묘를 복원할 때 개축했다.
전사청. 경의재 좌측에 자리한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장만하는 장소로서 2001년 복원됐다.
▷전사청(典祀廳)

경의재 좌측에 자리한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장만하는 장소로서 2001년 복원됐다.



◇배향자

△김문기(金文起.1399-1456)

김녕김씨로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으로 충북 옥천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낸 순(順)이며 아버지는 증 영의정 관(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했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됐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 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됐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됐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됐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모두 주살당할 때,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처형됐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장지도(張志道.1371-?)

고려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경상도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장을포(張乙浦)이고, 큰아버지는 운봉현감(雲峰縣監)을 지낸 장을해(張乙海)이다. 후손은 없다. 김천시 지례면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절의가 굳었다.

공민왕 때 향시에 합격하고 곧이어 문과에 급제해 기거주지의주사(起居注知宜州事)가 되어 명망을 얻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5년(태조 4) 교서소감(校書少監)인 그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하게 했다.

장지도는 예조의랑으로 있던 정혼(鄭渾)과 함께 교정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으나 왕자들의 권력 싸움으로 골육상쟁을 목도하면서 정치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김천 지례현으로 낙향해 은거했다. 장지도는 지례현 반곡에 머물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진 양성에 진력했고, 지역의 윤은보(尹殷保)와 서즐 등 훌륭한 제자를 길러 지례현의 문풍을 진작했다.

지례의 반곡석상에는 장지도의 시가 남아 있는데, 고려에 대한 절의와 조선에 대한 반감이 은근하게 배어 있다.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제자들이 부모의 예로 모시어 3년간 여막 생활을 했다.

제자인 윤은보와 서즐은 평소 스승이 후사가 없으니 우리가 마땅히 무덤에 여막을 짓고 3년간 마쳐야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윤은보는 이때 아버지가 병환이 있어 집으로 돌아가 구환했으나 잠시도 웃옷을 벗지 않았고, 아버지가 쾌차하자 곧바로 스승의 묘소로 돌아와 여막 생활을 했다.

시묘살이하던 중 윤은보는 부친상을 당하자 부모님의 여막 생활을 하였지만, 스승을 위해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제를 올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서즐은 홀로 스승의 묘소에 여막을 짓고 3년간 기거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본보기가 되었다. 이들의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지례는 예향의 명성을 얻게 됐다.

1432년(세종 14) 왕은 이들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고, 지례에 스승인 장지도와 제자 윤은보, 서즐의 행실이 함께 정표된 ‘삼효정려비’를 내렸다.

섬계서원에 배향됐고, 유허비가 김천시 지례면 들머리에 있다. 삼효정려비와 비각이 유허비와 나란히 있다.

△윤은보(尹殷保)

같은 고을의 서즐과 함께 장지도(張志道)에게 배웠다. 스승에게 아들이 없어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세상을 떠나자 시묘살이를 했다. 또 부친상에도 시묘살이를 했다. 바람에 향합(香盒)이 날아가 찾지 못했는데, 까마귀가 물어다 갖다 주었다. 세종 때에 정려가 내려졌다.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에 있는 윤은보의 묘소에는 명태조가 내렸다는 시가 새겨진 비가 있다.

▷서즐

호는 남계(南溪)이며,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윤은보(尹殷保)와 장지도(張志道)의 문하에서 배웠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대상(大喪)에 이르러 큰 눈이 쌓여 길이 막혀 제사고기를 올리지 못하여 밤새도록 울부짖었는데, 호랑이가 노루 한 마리를 물어다 주어 올렸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6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세종 때에 사연(司涓)에 임명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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