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최라라)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최영미(최라라)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아침부터 하늘이 흐린 날이다. 커튼을 열고 그 하늘을 거실로 들이면 흐림은 거실보다 내 가슴으로 먼저 들어와 물든다. 그때부터 시작된다, 센티멘털의 끝없는 질주는.

커피나 빵 굽는 냄새가 따라오는 건 기본이다. 나는 아직 깨지도 않은 잠 속에서 그 향기를 맡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에프 엠의 클래식, 조금 더 멀리서 오는 나무의 흔들림, 물이 계곡을 타고 흐르고 산이 조금씩 몸을 깨우는 소리….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를 음미한다. 레이스가 달린 긴 원피스 잠옷 차림의 나는 롤이 적당히 잡힌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슬며시 눈을 뜬다. 쟁반에는 식지 않은 커피와 빵 한 조각과 그림엽서 한 장, 엽서를 펼치기도 전 나는 그 내용을 다 가늠하는 듯 행복에 겨워한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보지 않아도 다 느낄 수 있는 것.

나는 지금 싱크대 앞에 서 있다. 햇감자를 깎으며 그 부드럽게 깎이는 감촉에 다음엔 많이 사놔야겠다는 생각이나 한다. 아이가 깰까 봐 도마 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감자를 썰고 환풍기를 세게 틀지도 않는다. 그러나 조심할수록 더 커지는 물소리, 덜거덕거리는 그릇 소리…. 나는 몇 번이나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치마에 손을 훔치고 방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 허둥대는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겸연쩍어 머리를 쓸어올리거나 피식 웃는다. 나는 축 늘어진 긴 머리에 라인이라고는 없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식탁에는 하얀 식탁보를 깔아야겠지. 은 숟가락과 포크를 놓고 가운데 은촛대를 놓으면 색깔이 잘 어우러지겠지. 에피타이저로는 아침에 배달된 유기농 야채에 숙성된 와인 빛이 도는 발사믹 드레싱을 살짝 곁들이면 좋겠지. 너무 많이 먹는 건 금물, 조금 먹는 숙녀가 아름다워 보이니까. 늦게 일어난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식탁에 앉으면 활짝 웃어줘야겠지. 어느 행성에서 왔는지도 모를 멋진 그이는 흰 셔츠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우리를 쳐다보고 활짝 웃겠지. 언젠가 집을 나갔던 래리가 돌아와 풀쩍 풀쩍 뛰어오르며 그의 셔츠에 발자국을 내어도 그는 마냥 웃겠지.

익은 김치를 꺼내고 양배추 초절임을 꺼내고 감자찌개를 떠서 원목 식탁에 놓으면 아침 준비가 끝이다. 아이들을 깨운다. 늦잠에 익숙한 아이들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조심스럽던 내 목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그러다 잠시 식탁에 멍하니 앉아본다. 나의 어렸던 그때, 나의 엄마도 이렇게 나를 깨우셨지. 나는 엄마의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엄마가 몇 번 더 내 이름을 불러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시시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가곤 했었지. 나는 아이들 이름을 몇 번 더 부른다. 내가 들었던 그 날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서.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벌써 놀이터로 나온 아이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한발 물러서면 그만큼의 세상이 더 보이고 한발 다가서면 그만큼의 미래가 더 보이는 것? 무엇이든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은 어른이 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지만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단지 내 마음을 내가 알아채야 한다는 것뿐, 내 마음이 알고 있는 길, 그 길로 가면 실패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뿐. 그러므로 마음이 흐릴수록 바깥을 볼 게 아니라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곳에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대부분의 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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