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석 새경북포럼 구미지역위원회 위원, 정치학 박사
윤종석 새경북포럼 구미지역위원회 위원, 정치학 박사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9년, 6ㆍ25 참전 유공전우회의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즐겨 쓰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4년에 접어든다.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를 회상하시며,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영웅담을 버릇처럼 말씀하신 기억이 또렷하다. 호국의 달 6월, 현충일은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 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기념일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버지 세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자유 수호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희생했던 전쟁 영웅이다.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참전해 헐벗고 굶주렸던 6ㆍ25동란의 당시를 회상하시며, 포탄의 전쟁터에서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해야 하며 서로 싸워 죽어야만 하는지, 도대체 얼마나 더 죽어야 이 전쟁이 끝이 나는지, 처참했던 그 당시를 말씀하실 때면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으시는 것과 같았다. 동족 간의 이념과 갈등을 넘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모두가 자초한 일본의 식민지 계급의 굴레가, 영원히 씻지 못할 상처를 만들고, 스스로 희생물이 된 그 처참한 대가가 한국전쟁이라고 하셨다. 원인과 결과를 두고 논할 때 모든 일은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인과의 법칙을 설명하신 것 같다.

‘한국이란 극동의 모든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나라이며, 한국 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진 미개한 인종이다’ 1905년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을사늑약의 원인이 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지시하며 발언한 내용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 지배를 서로가 묵인하는 협정이다.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흥정으로 각인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고 얼마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곧이어 1910년 병탄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권 상실에 악재로 작용한 비밀협약은 그 당시 우리 국민의 무능함과 부패한 정부를 바라보는 강대국의 혐한 인식에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힘과 주권을 향한 의지가 생존과 발전의 척도라는 기본적 사실조차 망각하면서, 외세의 침략에 무방비한 당시의 우매함이 원인이 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결과는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의 사례를 들어 언급한 배경을 두고 청와대와 보수야당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 이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 추념사는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은 통합의 취지’라는 청와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분열의 정치를 대통령이 주도한다는 야당의 거센 반발이 계속되고 있다. 독립운동사에서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었던 약산 김원봉 선생은 영화 ‘밀정’을 통해 우리에게 뒤늦게 알려진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남과 북 어디에서도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불운한 독립 운동가이다. 좌우 이념을 넘나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당시의 독립투쟁사를 재조명한 것은 현실의 갈등과 이념을 넘어 통합의 대한민국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다. ‘같은 말도 듣기에 따라 이해도가 달라진다’격동의 세월 속에서, 당시의 암울했던 대한민국의 운명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누가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하는가,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냉혹한 국제관계 속에서 현실을 제대로 보고 진정국가를 위해 노력하는 자는 얼마나 되고, 부패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정치인이 얼마나 되는가. 서로의 정치적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좋은 말도 궤변으로 포장하는 정치적 세력이 부끄럼 없이 나라를 팔아먹는데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만약 (제가) 그때 그 시절에 살았다면 목숨 걸고 희생을 각오하고 독립운동을 했을 것인가 그런 자문을 해보기도 한다. 이 영화가 우리 국민 모두의 애국심을 다시 한 번 깨우치는 좋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새삼스럽게 들리지만 당시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영화 ‘밀정’을 보며 한 발언이다. 그때의 만세삼창과 발언이 진심이었다면, 정파와 이념을 넘어 통합의 대한민국을 생각해야 하며, 애국의 의미를 되새기는 호국의 달 6월에 말이 말을 만드는 막말로 더 이상의 정치적 논쟁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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