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체구의 스웨덴 공격수가 힘껏 날린 슛을 막고 나면 내 가슴이 텅텅 울렸어요. 날아오는 슛을 받아 길게 보내고 난 뒤 골문 앞으로 다시 되돌아와 몸을 돌리면 상대의 공은 벌써 페널티에어리어에 와 있었지요. 우리 수비진은 그냥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어요. 견디다 못한 나는 관중 있는 스탠드로 길게 볼을 내질렀어요. 볼 보이가 공을 주어 되돌아오는 시간이 우리 선수에게 공을 주고 되돌아오는 시간보다 길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처럼 여유 공이 없이 하나의 공으로 경기가 진행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한국팀은 멕시코와 1차전에서 5대3으로 승리했지만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0대 12로 대패했다. 당시 골키퍼였던 홍덕영은 “비가 내려 가죽으로 만든 공이 물에 젖어 무거운 데다 스웨덴 선수들의 슈팅이 어찌나 강한지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며 그때의 악전고투를 회고했다. 홍덕영은 9점을 잃을 때까지 세다가 그 뒤로는 세는 것도 그만두고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점수를 물었지만 대답이 제각각이었다. 다음날 신문을 보고서야 스코어가 0대 12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한국의 월드컵 첫 출전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이다. 당시 최강팀인 헝가리와 맞붙어 0대 9로 참패, 또 한 번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관중들은 “코리아, 코리아”를 외치며 약팀인 한국을 응원했지만 한국팀은 선수 4명이 경기 도중 다리에 쥐가 내려 쓰러지는 바람에 마지막엔 7명만 뛰는 기상천외한 경기를 벌였다. 한국팀의 0대 9 대패 스코어는 월드컵 사상 최다 골 차로 기록됐다. FIFA는 한국의 참패를 보고 아시아지역의 축구가 수준 이하라며 이 지역 출전국 수를 1개 국으로 제한하는 결정을 내렸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엔 국고에 외화가 동이 나 단체팀은 출전시키지 못했다. 이 바람에 축구팀도 14명의 대표선수를 선발했지만 참가하지 못하는 눈물겨운 사연도 있었다. 이처럼 세계 축구 무대에서 바닥 수준이었던 한국축구가 숱한 악조건을 극복,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에 이어 이번 ‘U-20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사상 전인미답의 준우승 거봉에 새 금자탑을 세웠다. 이강인의 ‘골든볼’ 수상은 금상첨화의 겹경사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