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우리는 우리가 유난히 체면에 강한 민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의식은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도 우리 못지않습니다. 한자(유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모두 사정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쪽 나라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동아시아 특유의 ‘체면 문화’를 접할 때가 많아졌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동안 우리는 체면을 중시하는 관습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 세대처럼 처음부터 미국식 실용주의 교육관 밑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실생활을 좀먹는 허례허식이나 과장된 자기과시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었습니다. 당연히 잘못된 폐습으로 마땅히 타파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체면치레’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그 말은 진심과는 늘 거리가 있는 가식적인 그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체면 없이’ 살아온 지도 어언 반백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루스 베네딕트라는 미국 여성이 쓴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접하고 그동안 ‘체면 없이’ 살아온 지난 세월들이 문득 후회가 됩니다.

…일본인은 치욕감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분명히 정해진 선행의 도표(道標)를 따를 수 없는 일, 여러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또한 발생할 수 있는 우연을 예견(豫見)할 수 없는 일, 이것이 치욕이다. 치욕은 덕의 근원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치욕을 쉽게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선행의 여러 규율을 실행하는 인간이다. ‘치욕을 아는 인간’이라는 말은, ‘virtuous man’[유덕(有德)한 사람], 어느 때는 ‘man of honor’[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번역된다. 치욕은 일본의 윤리에 있어서 ‘양심의 결백’, ‘신에게 의롭다고 여겨지는 일’, ‘죄를 피하는 일’이 서구의 윤리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권위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사람은 사후(死後)의 생활에서 벌을 받는 일이 없게 된다. 일본인은 - 인도 경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승려들을 제외하고는 - 이 세상에서 쌓은 공죄(功罪)에 따라서 다른 상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 교리를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크리스트교에 귀의(歸依)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 사후의 상벌, 내지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루스 베네딕트(하재기 옮김), 『국화와 칼』 제10장 「덕의 딜레마」]

‘치욕’이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 행동에 대한 세평(世評)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 입니다. 남들이 나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내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런 유추된 판단이 내 행동방침의 기준을 형성합니다. 그렇게 ‘체면이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내면화된 금지 의식’이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누가 앞장서서 강제(强制)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서 규범을 준수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체면 없는 자로 매도됩니다. 근자에 제가 사는 도시의 부(副)간선 도로에 중앙분리대 공사가 한창입니다. 무단횡단과 중앙선 침범 방지용입니다. 도로 가운데 큰 못을 박고 연결해서 사람 허리 높이의 차단대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려면 실기에 앞서서 교통법규부터 숙지해야 합니다. 그때 생명선인 노란 실선(實線)은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고 배웁니다. 저도 반평생 동안 그 규율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흉물스런 중앙분리대는 그런 ‘내면화된 금지 의식’을 하루아침에 무색게 합니다. 계몽이 필요한 곳에 금지를 앞세우는 것이 바로 미개와 후진의 특성이라 할 것입니다. 체면과 치욕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법과 강제로만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겠다고 생각하는 정치와 행정이 있는 곳이 바로 후진 사회입니다. 도로 곳곳에 설치된 흉물스런 과속방지턱과 중앙분리대를 지금 바로 철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제 체면 없이 막사는 인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선진국 국민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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