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 봄비 오는 저수지가에
우산도 없이 앉아 있다
빗소리는 비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진즉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모두가 빗소리거니 무심했는데
오늘은 가는비가 저수지에 내리는 소리
어렴풋한 소리가 이리 사무칠 줄은
그 남자 미처 몰랐다
풀숲이나 바위에게도
지붕이나 우산에게도
비는 그들의 아픈 소리를 만들어주지만
멀리 내려온 빗물이 넓게 고인 물을 만나 내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하여서 아픈 줄을
탈상하는 날에 그 남자
비 오는 저수지가에 앉아 처음 알게 되었다.





<감상> 비는 풀숲, 바위, 지붕, 우산이 지닌 아픔을 받아 주기에 빗소리가 됩니다. 세차게 내리다 멈추는 소낙비보다 저수지에 내리는 가는비(가랑비의 방언)의 어렴풋한 소리가 더 사무칩니다. 가랑비 내리는 소리가 가랑가랑 눈동자에 맺히는 눈물처럼 저수지에 고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탈상(脫喪)하는 날에, 멀리 내려온 빗물이 넓게 고인 물을 만나 내는 소리가 고요해서 너무 아픕니다. 견뎌온 슬픔을 넓게 고인 물이 받아주고, 그 소리 들릴 듯 말듯 한 동안 물처럼 저수지에서 빙빙 돌 것입니다. 비가 내 아픔에 귀 기울여 주니, 언젠가 내 슬픔도 물처럼 넘쳐서 물종(水門) 속으로 떠내려갈 것입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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