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봄의 축제가 한창이다. 너무 아름답다. 살아있다는 것이 마냥 감사한 계절의 절정에 서 있다. 신비롭고 오묘하게 피어오르는 봄의 세계가 가슴 설레게 한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만 솟아오르는 것 같아서 그 감동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계절마다 주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그 중에서 봄이라는 계절은 살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는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계절에게는 붙여주지 않고 유일하게 봄에게만 붙여주는 말, <새 봄>이다. 단순한 봄이 아니라 <새 봄>이다. 지금 땅위에는 봄의 축제가 한창이고 더불어 사람들도 그 축제에 초대받은 존재들이 되어 삼삼오오 바깥나들이 하기에 분주하다.

목련을 보고나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수놓고, 더불어 벚꽃의 화려함은 눈부시도록 세상을 밝혀준다. 사람들은 저마다 봄놀이 즉 꽃놀이에 도취되고, 꽃구경 한 번 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일이라도 되듯이 저마다 가슴 가슴마다 봄바람, 꽃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아름다운 모습들, 행복한 표정들이다. 내 자신을 보며, 세상 위의 저들을 보면서 문득 언젠가 감상했던 시인 이승훈 님의 ‘봄’이라는 시를 더불어 감상하고 싶다.

“일하던 손을 놓고/ 앞을 보니/ 봄이 쑥 솟는구나/ 일하던 손을 놓고/ 뒤를 보니/ 산이 쑥 솟는구나/ 산은 미친 산/ 꽃이 피는 산/ 시 짓던 손을 놓고/ 밖을 보니/ 님이 쑥 솟는구나/ 님은 귀가 먹어/ 내 말 못 들어/ 님은 웃기만 하고/ 꽃은 피기만 하고/ 무슨 공부를 한다고/ 겨우내 웅크리고 앉아/ 추운 방에 불을 켜고/ 영어책 읽었지만/ 시도 썼지만/눈이 나빠/ 제대로 못 읽고/ 골이 아파/ 제대로 못 쓰고/ 머리 나빠/ 제대로 못 읽었지만/ 문득 봄이 오니/ 오늘은 서울에나 갈까/ 오늘은 또 무슨/ 병이 도저/ 창가에 서서/ 골이 쑤셔/ 사방이 너무 고요해/ 문득 잠이 쏟아져/ 님이라도 만났으면/ 일하던 손을 놓고/ 앞을 보니/ 와아 하고/ 봄이 몰려오네/ 봄만 몰려오네/ 보아도 보아도/ 다 못 보는/ 유리창 너머/ 봄만 쑥 솟아 오르네. -전문-”

이 작품을 감상하다가 문득 무엇인가 모르게 힘이 불끈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을 하고 있다. 공부를 하고, 사랑을 하고, 일을 해도 무엇인가 시원찮은 시인의 삶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들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노력해 보지만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답답한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실직의 아픔을 겪는 오늘의 이웃들의 모습을 보게 해 준다.

그러나 시인은 유리창 너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쑥 솟아오르는 봄을 보았던 것이다. 새 봄을 보았던 것이다. <쑥 솟아오르네>라는 시인의 표현이 새 봄을 맞이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보였으면 좋겠다.

그렇다. 봄은 지지부진하던 겨울의 무겁고 음습하고 반복되던 일상의 삶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계절이다. 무엇을 해도 성공할 수 없었던 것 같은 삶의 주변머리를 정리하고 솟아오르는 봄 속으로 나오게 한다.

절망과 좌절의 반복 속에서 삶의 의미를 포기해 버린 사람들에게 조차도 봄의 절정은 희망으로 찾아들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봄바람이 좋고, 봄나물이 좋고, 봄꽃이 좋다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봄을 만져보고 느끼고 체험해 보자. 그리고 봄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보자. 삶의 모든 현장 속에서 <새>를 붙이는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 어제와 오늘이 다른, 오늘과 내일이 다른 봄날 같은 인생을 살아보자.

어렵지 않은 일이다. 봄 속에서도 겨울을 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 속에서도 봄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정녕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 소중한 삶을 음습하고 어두운 겨울 속으로 몰아넣지 말고, 밝고 희망찬 새 봄 속으로 달려 들어가 보자. 그 곳에서 새로운 출발,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은 봄이 쑥 솟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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