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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46. 김천 하로서원
[서원] 46. 김천 하로서원
  • 박용기 기자
  • 승인 2019년 07월 03일 17시 48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7월 04일 목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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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가난을 자랑으로 여긴 청렴한 선비의 향취가 물씬
하로서원 전경.
하로서원(賀老書院)은 벽진이씨 집성촌인 김천시 양천동 829번지 하로 마을에 있는 서원으로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을 배향하기 위해 1984년 노촌당(老村堂) 옆에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하면서 하로서원으로 개창했다.

하로서원의 근원은 1648년(인조26) 김천시 감천면 금송리 원동마을 입구에 세워진 경렴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이약동 등 3인을 제향했다.
하로서원 현판
1673년(현종14) 인근의 이아리(爾雅里)로 옮기면서 동대(東臺) 최선문(崔善門), 남정(嵐亭) 김시창(金始昌)을 추향(追享)하고 1758년(영조34) 김천 자양산(紫陽山·紫山·현 김천시 성내동 161번지)로 이전하며 1778년(정조2) 매계의 후손인 조유(曺逾)를 추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됐는데 훗날 서원복원을 위해 오랫동안 논의를 해왔으나 끝내 의견이 맞지 않아 양천동 하로 마을 벽진이씨 문중에서 1983년 하로 마을 노촌당 옆에 이약동의 위폐를 봉안한 청백사를 준공한 후 하로서원이라 이름했다.



△입지환경과 건물배치

하로서원은 백두대간 황악산에서 분기한 덕대산이 감천을 향해 내려오다가 멈춘 고성산 남쪽 골인 양천동 하로 마을 입구에서 감천을 향해 동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원 터는 원래 이약동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학문을 논하며 강학하던 유허지로서 1845년 노촌당, 1981년 동·서재 건립과 함께 생가터에 있던 유허비를 옮겼고 1983년 사당 청백사를 건립되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강당이 좌측, 사당이 우측에 배치된 좌학우묘(左學右廟)형으로서 근년에 세워진 관계로 교육 기능보다는 제향 기능이 강조된 서원이다.

하로서원의 강당인 노촌당
△노촌당(老村堂)

하로서원의 강당으로 1845년 이약동이 관직에 물러난 후 말년을 보낸 유허지에 건립하고 문중 구성원의 회합 장소로 이용했으며 경재당(敬梓堂)이라고도 했다.

1983년 사당인 청백사와 동·서재가 세워져 서원의 면모를 갖추기 전인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서당으로 운영됐고 양천초등학교가 개교되기 전인 1940년대 말에는 임시 초등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툇간을 넣은 전퇴집이다. 서원 강당 건물에서는 보기 드문 가구식 기단을 쌓고 자연석을 활용한 덤벙 주초에 원기둥을 세웠다.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넣었는데 방앞과 측면에 대청마루로 연결되는 툇마루와 쪽마루를 달았다.

내부의 지붕틀은 대청마루를 가로지르는 대들보와 양 온돌방 사이에 충량을 걸고 충량과 종보,종보와 종도리사이에 동자주를 세웠다.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 천장이며 전반적으로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 집이다.
하로서원의 사당으로 평정공 노촌 이약동을 제향하고 있는 청백사
△청백사(淸白祠)

하로서원의 사당으로 평정공 노촌 이약동을 제향하고 있다. 노촌실기에 1648년 노촌의 현손으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역임하고 감천면으로 낙향한 이홍명(李弘明)의 후손들이 선조인 이약동을 기리기 위해 청백사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청백사는 훗날 김종직, 조위와 함께 이약동의 위패를 봉안한 경렴서원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오랫동안 서원복원 운동이 전개되던 중 1983년 벽진이씨 문중에서 이약동의 위패만을 모신 청백사를 선생의 출생지인 양천동 하로 마을 노촌당 옆에 세웠다.

강당 앞에 설치된 외삼문을 통해 진입한 후 다시 내삼문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서원 건물배치 양식과 달리 하로서원은 사당으로 진입하는 영은문(永恩門)이라는 별도의 외문과 숙경문(肅敬門)이라는 내삼문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혼합식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하로서원 기숙사인 동재 염수료.
△염수료

하로서원 기숙사인 동재로서 1981년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에 있던 재실을 이전해 건립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전면에 툇간이 있는 전툇집 팔작지붕이다.

가구식기단 위에 원형 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후면으로 2개의 돌출한 형태의 다락인 개흘레를 내고 까치발을 달아 지탱하고 있다.
하로서원 기숙사인 서재 필유재.
△필유재(必有齋)

하로서원 기숙사인 서재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퇴집 팔작지붕으로 1981년 동재와 함께 건립됐다. 동재와 달리 사각의 방형 주초와 사모 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툇간의 양 측면을 심벽으로 막아놓은 것이 특징이다.



△평정공노촌이선생유허비(平靖公老村李先生遺墟碑)

강당인 노촌당과 사당인 청백사 사이에 있는 유허비는 양천동 하리 199번지 노촌선생의 생가 터에 1846년(헌종 12년) 세워졌던 것을 198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비각을 세웠다.

이약동의 외손으로 형조판서를 제수받은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찬하고 이조참의 이석찬이 글을 썼다.

이병권 벽진이씨 평정공파 19대 종손이 하로서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향자

▷청백리 평정공(平靖公) 노촌 이약동(李約東)

이약동은 1416년(태종16) 양천동 하로 마을에서 해남 현령을 역임한 벽진이씨 이덕손(李德孫)과 고흥 유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춘보(春甫),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藥師庵)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을 담은 것으로 전해진다.

소년기에 개령현감을 역임한 영남의 대학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생으로 수학했고 강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봉계 출산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우했다.

26세 되던 해인 1442년(세종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1)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헌부감찰(39세), 성균관직장(43세), 청도군수(44세), 선전관(49세), 구성부사(51세), 제주 목사(55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59세), 사간원대사간(62세), 경주부윤(63세), 오위도총부 부총관(66세), 호조 참판(68세), 전라도 관찰사(71세), 이조참판(72세), 개성 유수(74세), 지중추부사(75세)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주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평정공은 성정이 부드럽고 인자해 지방관으로 재임 시 가는 곳마다 칭송이 따랐는데 특히 1470년 제주 목사로 도임한 직후 매년 2월에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산신제로 인해 백성들이 동사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제단을 산 아래로 옮기게 한 일은 지금까지도 도민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일화다.

이임할 때 관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관아에 남겨두고 말을 타고 나섰는데 성문에 이르러 비로소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문 위에 걸어 놓았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채찍이 떨어졌다.
평정공노촌이 선생 유허비,
평정공이 76세에 향리인 하로 마을로 낙향할 때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는데 가난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겨 교훈으로 삼게 했다.

‘내 살림 가난하여 나누어 전할 것이 없고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서 욕이 되거늘

차라리 청백으로 너희에게 전함만 못하리’

육당 최남선은 이약동을 우리나라 유사 이래 최고의 청렴결백한 관리로 꼽았고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에 관리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언급하며 이약동이 말의 채찍을 제주도 관물이라 하여 성루에 걸어둔 괘편암과 받은 갑옷을 바다에 던진 투갑연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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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 기자 ygpark@kyongbuk.com

김천,구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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