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47. 안동 화천서원
[서원] 47. 안동 화천서원
  • 오종명 기자
  • 승인 2019년 07월 10일 18시 29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7월 11일 목요일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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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벗삼아 처사적 삶 추구하던 선비의 모습 닮았네
화천서원은 유운룡의 학덕을 기려서 지역 유림들이 1786년에 세원 서원으로 대원군에 의해 훼철됐다가 후손들이 30년간 기금을 모아 1996년에 복설했다.
하회마을을 품은 화천서원(花川書院).

안동 하회마을의 부용대 동쪽 산기슭에 위치한 화천서원은 하회마을의 기운을 담은 서원이다. 부용대는 태백산맥의 맨 끝부분에 해당하며 정상에서 안동 하회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이 64m의 절벽이다. 이 부용대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옥연정사에서 왼편으로 산기슭을 따라 동북쪽 방향으로 가면 화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의 이름은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 지류의 이름 ‘화천’을 딴 것이다. 서원은 조선중기 퇴계 학문을 수학한 문경공 겸암 류운룡(1539~1601) 선생을 기리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림이 뜻을 모아 1786년에 건립했다. 류운룡은 서애 류성룡의 맏형이다.
화천서원 현판.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 훼철령으로 강당과 살림집으로 쓰인 주소(廚所)만 남고 헐리게 되어 한동안 ‘화천 서당’으로 불리었다.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은 1966년부터 30여 년간 기금을 모아 1996년에 복설(復設)하여 서원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화천서원은 건립 후 류운룡을 주향으로 하고 동리 김윤안과 종손자인 류원지를 배향하여 1871년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기 전까지 100여 년 이상 춘추로 향사를 지내왔다.
화천서원 강당 정면
강당과 주소를 제외한 건물들은 다시 세운 것으로, 강당은 19세기 이전의 오랜 양식을 찾아볼 수 있으나, 당대 건축물의 특징이나 미(美)가 두드러진다기보다는 학문을 익히는 장소의 성격이 강하다.
지산루
서원의 강학공간은 강당 숭교당, 동재 존현재, 서재 전학재, 문루 지산루 등으로 구성됐다. 숭교당은 동재와 서재가 앉은 자리보다 높게 조성한 단위에 자리했으며, 처마 아래에는 ‘화천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 중앙의 대청 좌우로 온돌방 협실이 있는데, 서쪽 방은 주경재, 동쪽 방은 사성재다.

△우애와 효도를 실천한 겸암 류운룡.

겸암 류운룡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후 영의정에 추증된 풍산부원군 류중영(1515~1573)의 맏아들로 안동 하회마을에서 태어났다. 총명함과 우애 그리고 효성을 타고난 그는 16세 때(1554년)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갔다.

겸암은 퇴계 문도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급문(及門)해 아주 오랜 기간 선생으로부터 깊이 있는 학문을 전수한 대표적 제자였다.

그는 경학행의(經學行義)로 이름이 높아 1572년(선조5) 음사로 전함사 별좌가 되었다. 이후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으며 1595년에는 벼슬이 원주목사에 이르렀고 이조판서로 추증되기도 했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겸암은 향리에 은거하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처사적(處士的)인 삶을 희구했으며 깨끗한 선비정신과 우애와 효도를 실천한 분이다.

학자로서의 면모는 그가 퇴계 학단의 숙원 사업이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편찬에 깊이 관여했다. 퇴계 선생 사후에는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과 계몽전의(啓蒙傳疑) 교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문장가로서의 위상은 43세 때(선조14) 강상(綱常)의 죄를 범해 혁파된 안동부의 복호(안동부로의 환원)를 청하는 상소문을 지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음직으로 벼슬을 시작한 이래 뜻하지 않았지만 진보현감, 인동현감, 한성부 판관, 풍기군수, 원주목사 직 등을 맡았다. 특히 지방 직인 고을 수령 재임 때는 임진왜란 전후 피폐한 민생 회복에 헌신해 많은 치적을 남겼다.

임진왜란 당시 풍기군수로 있을 때는 험준한 산악에서 혼란기를 틈해 발호한 도적들을 제압해 인근 고을까지 안도하게 했다. 그 뒤 원주목사가 되어 올렸던 군국편의소(軍國便宜疏)에서는 겸암의 탁월했던 경세제민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인동현감으로서 7년간의 치적은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목민심서 호전(戶典)에까지 올라 있을 정도다. 지금도 인동현감 옛터에 가면 선정비가 남아 있다.

비를 세웠을 당시 34세였던 여헌 장현광은 5언 장편으로 고을을 떠나는 15년 선배인 겸암을 위해 시를 지었다. 시에서 여헌은 겸암의 학문 연원을 밝힌 뒤 지주중류비를 세운 공과 아울러 업적을 기렸다.

백성들 날마다 어루만져 편안케 하였고(黎庶日撫摩)

군사와 국방의 일 부지런히 살폈지(軍兵勤施設)
겸암정사
△겸암정사와 만송정 숲.

부용대에서 하회마을 쪽을 바라보며 오른쪽 숲길로 들어서면 서애의 형이자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이 1567년(명종 22)에 지은 ‘겸암정사’가 나온다. 정사(精舍)란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호는 퇴계가 류운룡의 학문적 재질과 성실한 자질에 감복하여 지어준 것으로 이를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 한다.

퇴계 선생은 겸암이 정자를 지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이 새 정자를 지었다는데 내가 가서 함께 공부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라는 시와 함께 주역의 겸괘(謙卦)에서 딴 겸암정(謙菴亭)이라는 현판을 손수 써서 내렸고 이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만송정 숲
산자락이 낙동강을 향해 흐르다 숨을 고른 듯한 좁은 터에 있는 겸암정사의 누각에 올라서면 강 건너 모래사장과 송림 그리고 하회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년기념물인 만송정 숲은 조선 선조 때 류운룡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이라 전해진다.

매년 음력 7월 16일 밤에는 이 숲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 꼭대기까지 밧줄로 이어 불꽃을 피우는‘선유줄불놀이’가 펼쳐진다. 4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줄불놀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수십 년간 중단됐다가 최근 다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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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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