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설] 명창 박록주와 김유정
[삼촌설] 명창 박록주와 김유정
  •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 승인 2019년 07월 16일 16시 52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7월 17일 수요일
  • 18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28년 봄, 서울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팔도 명창경연대회가 열렸다. 조선극장은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당시 3대 극장 중 하나였다. 전국의 명창들이 다 출연하다시피 한 이날 공연에서 재창, 삼창의 ‘앙코르’를 받은 당대 최고 ‘명창’이 있었다. 그는 당시 24살의 박록주였다.

이날 공연이 끝난 뒤 수많은 관객 가운데 두 사람이 박록주를 찾았다. 한 사람은 전 부통령 김성수의 아버지 김경중 영감이었고, 한 사람은 당시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고 있던 새파란 문학청년 김유정이었다. 김경중은 수운동에 3000원 짜리 집을 사주며 박록주를 지원했다.

‘봄봄’ ‘소낙비’ 등 주옥같은 소설을 쓴 요절 소설가 김유정과의 짝사랑은 애틋하다. 사랑은 결국 이뤄지지 않아야 아름답듯 박록주와 김유정의 경우가 그랬다. “나는 조선극장에서 선생이 소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기를 끄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나는 당신을 연모(戀慕)합니다. 나는 22살의 연전(延專) 학생이오.…” 김유정이 박록주에게 보낸 연서다.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김유정의 구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김유정은 거의 매일 구애편지를 보냈고, 환심을 사기 위해 비단 치맛감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박록주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자 혈서를 써 보내고, 찾아가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극장 신용희와 사랑에 빠진 박록주는 김유정의 구애를 거절했다. 박록주는 김유정이 요절하고 나서야 그의 사랑을 매정하게 뿌리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수많은 소리꾼 중에 진정한 ‘명창’이란 화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명창’ 소리를 들으려면 ‘더늠’이 있어야 한다. 노랫말과 소리가 소리꾼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다듬어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적인 대목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갖춰야 ‘명창’이라 부를 수 있는데 동편제 명창 ‘박록주’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박록주의 고향 구미시에 그의 이름을 딴 길이 생겼다. 구미시 고아읍의 박록주 고향 생가 인근 도로 500m를 ‘박록주로’로 명명하고 지난 12일 기념행사를 했다. 박록주로를 걸을 땐 김유정도 기억해주면 좋겠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의 다른기사 보기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donlee@kyongbuk.com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