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머리 좋은 것들은 파쇼(Fascio, 19세기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정치결사체의 이름.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구내식당에서 몇 사람이 함께 점심을 먹을 때였습니다. 파쇼는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지금은, 자기들끼리는 강한 일체감, 폭발적인 에너지, 결연한 순수성을 공유하면서 타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억압을 행사하는 모든 행태를 파쇼라 부릅니다. 그런 파쇼와 ‘머리 좋은 것들’을 하나로 묶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래놓고 주위를 둘러보니 저 혼자만 그 말에 동조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었습니다. “머리 좋은 것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머리 좋은 것들은 단결을 못하고 늘 분열한다.”와 같은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머리 좋은 것들은 파쇼다.”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투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맞다. 소위 일류 학교 출신들이 선후배 많이 따지고(챙기고) 자기들끼리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산다.” 그러자 한두 명의 표정이 “아, 그런 거였어?”라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저의 편들기에 힘을 얻었는지 처음 말을 꺼낸 이가 또 한마디 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검찰 문화도 사실은 파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검사동일체 운운하면서 파쇼를 자처한 게 여태까지의 검찰 아니었나? 전직 검찰국장이 직권남용으로 징역 2년 선고받고 감옥에 가 있는 게 다 그 대가를 치르는 거 아니겠나?” 그런 말로 좌중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한두 사람은 머리를 끄덕였고 한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아마 “그렇게 범위를 넓히면 파쇼 아닌 게 어디 있겠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세한 것은 밝힐 수 없습니다만 그것 이외에도 학계와 정계 등에 만연한 우리 시대의 파쇼들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파쇼 이야기로 모처럼 점심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연구실로 돌아와서 ‘머리 좋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잠시 더 했습니다. 세칭 일류 고등학교를 나온 덕에 진짜 머리 좋은 친구들을 운 좋게 가까이서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열에 아홉, 머리 좋은 아이들이 심성도 착했습니다. 간혹 한두 명, 아닌 아이도 있긴 했습니다만, 그런 아이는 결국 ‘진짜’ 머리 좋은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진짜 머리 좋은 아이들은 결코 남의 비난을 받을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지력도 강하고 절제력도 있고 포용심도 넓었습니다. 늘 앞서 주변을 챙기고 배려했습니다. 커서도 그런 친구들은 예외 없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학계, 법조계, 의료계, 재계, 정계 할 것 없이 지금도 모두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타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머리 좋은 것들은 파쇼다.”라는 비난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게 의문입니다. 아마 진짜 ‘머리 좋은 것들’을 보지 못한 탓이거나, 아니면 우리사회에서 가짜 ‘머리 좋은 것들’이 지나치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 탓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재론’ 한 대목을 책에서 찾아 읽었습니다(점심시간에 써먹을 요량으로요).

…인과성의 법칙이나 동기 유발의 법칙에 따라 여러 관계를 날카롭게 파악하는 것이 지적 작업의 일반적 형태이지만, 천재의 인식은 관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과 대화를 해도 상대편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화제가 되고 있는 문제가 더 생생하게 머리에 떠오르기 때문에, 그쪽을 먼저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흥미 때문에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말하며,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인 경우에도 잠자코 있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대화 중에도 독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쇼펜하우어(권기철 옮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중에서]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