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평소 지역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자주 찾아본다. 그리고 자료에 나타난 기록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걷다 보면 동네 곳곳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승효상 건축가의 표현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 즉, 터 무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무늬 중에는 이미 익숙한 것들도 많이 있지만 가끔 우연찮게 새 무늬를 발견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포항은 형산강이 영일만 바다로 흘러들면서 만들어진 지형이어서 풍부한 어자원 덕에 예부터 해로를 이용한 장시가 발달했다. 포항 연일의 부조장은 서해 강경장, 남해 마산장과 더불어 남한의 3대 시장이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불행하게도 일제강점기와 겹치게 된 것처럼 포항의 근대모습 역시, 같은 시기에 형성됐다. 1927년에 발표된 ‘조선철도 12년 계획’이라는 자료집에는 동해선 철도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데 여기서 포항은 북쪽의 원산과 남쪽의 부산을 연결하는 동해중부선의 시작 역으로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옛 포항역을 지나 북으로 송라면까지 당시 철도 노반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고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교각과 터널들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학생 시절 충혼탑이 있어 호국의 달 행사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우범지대라 가기가 꺼려지던 수도산도 알고 보면 이야기의 보고(寶庫)다. 조선 초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하고 이 산에서 순절한 모갈거사의 이름을 따서 모갈산으로 불렸다가, 일제강점기에 상수도 시설을 설치하면서부터 수도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1926년 당시, 물을 저장하였던 저수조(貯水槽) 건물이 아직 수도산에 남아 있다. 또, 광복 후에는 개신교 교회로, 그 이후에는 천주교교회가 자리 잡아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터에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신사가 있었다는 사실도 우연찮게 문헌을 통해 알게 됐다. 이렇듯 지역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 즉 새 무늬를 찾는 일은 언제나 흥미진진 하다.

반면, 이미 잘 알려진 역사의 흔적이 의식 부족으로 인해 잘못 보존되고 있는 지역을 가보거나 지금은 사라진 역사건물의 옛 자료사진을 들 척일 때는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마저 일 때가 있다. 항상 지적되곤 하지만 구룡포의 옛날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일본인 가옥거리’로 지정돼 젊은 세대를 위한 역사교훈의 현장이기 보다는 일본 전통복장 체험촌으로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현실엔 절망감마저 느낀다. 얼마 전 시 승격 70주년을 기념해 과거 포항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된 적이 있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만 아련한 옛 포항시청사, 경찰서청사 등의 사진들을 보면서 만약 철거되지 않은 채 지금 역사건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왜냐하면 보존경제학자 도노반 립케마(Donovan D. Rypkema)의 주장처럼 지역사회가 소유한 역사적 건물은 도심지 활성화라는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 재생 혹은 도심지 활성화 등의 개념은 현대 들어 도시팽창의 부작용을 경험한 뒤 주목받게 된 개념이기 때문에 철거 당시에 역사건물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해서 무조건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지금도 그러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옛 포항역 건물이 한 치의 거리낌 없이 허물어뜨린 지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시 승격 70주년을 맞아 포항미래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난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 없이 단순히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한 울림에 그칠 뿐이다.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지 역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 확립될 필요가 있다. 지역 정체성이란 것이 결국, 타 지역과의 차별성이라면 그 차이는 지역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몇 해 전 우리 지역에서 ‘포항학’에 대한 관심이 대두된 적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 실행단계로까진 이어지지 못했다. 우리 지역 역사 바로알기를 통해 제대로 된 ‘포항학’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이제라도 다시 이루어졌으면 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