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학교 교수
손화철 한동대학교 교수

1992년 방위병으로 훈련소에 입소하니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했다. 청소부터 줄 맞추어 서고 걷기, 얼차려까지 안 해 본 게 없었다. 군대문화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그 말의 의미는 몰랐는데, 국민학교(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살아온 환경이 그대로 군대였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1963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장군 출신의 대통령이 재임했으니 학교나 사회에 군대문화가 스며든 건 당연한 일이다.

문민정부가 되고 민주화가 되었다 해서, 군대문화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군대식의 훈육을 받은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지금, 군대문화는 여전히 잘 살아있다. 오늘날 첨예한 세대 갈등은 군대문화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는지 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군대문화의 요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일사불란(一絲不亂)의 추구다. 전쟁에 임하는 군인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명령에 약간의 하자가 있더라도 복종해야 하고, 개인적인 욕구보다는 전체의 요구를 우선해야 한다. 군대의 일사불란은 공동체 문화와는 다르다. 공동체 문화는 남을 배려하여 스스로 양보하는 것이지만, 군대에서의 개인행동은 벌을 받아야 할 위험한 일이고 전시에는 즉결처분 대상이다. 검찰로부터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직에서 ‘한마음 한뜻’을 강조할 때 나는 그 의미가 못내 궁금하다. 배려와 타협, 양보를 통해 함께 뜻을 이루자는 공동체 의식보다는 정연한 조직의 대열에 서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군대식 일사분란의 정신이 느껴지는 때가 더 많다.

군대문화를 이루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적과 아군의 분명한 구분이다. 군대는 적이 확실하고 적에 대한 적대심이 클수록 강해진다. 그래서 군대의 문화가 일상으로 들어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 큰 위험이 된다. 민주주의는 다른 의견을 허용하고 때로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조정할 방법을 찾는 방도다. 때로 의견의 불일치가 격해질 수 있지만 한 사회의 구성원은 적일 수 없다. 군대에서의 적이란 죽여도 적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군대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적에게 쓰는 언어를 동료 시민에게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얼마 전 한 정치인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본과의 갈등 국면을 언급하면서 “토착왜구보다 토착빨갱이를 몰아내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썼다. 어떻게 해서든 관심을 끌어야 하는 대중 정치인의 안타까움까지 탓할 생각은 없지만, 진영을 막론하고 ‘왜구’와 ‘빨갱이’ 같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횡하는 현실은 암담하다. 우리 역사의 맥락에서 그 말들은 ‘죽여도 되는 사람’, 곧 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사용하면서 민주주의 공동체를 이루는 건 불가능하다.

군대문화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닐 터이다. 문제는 군대가 아닌 곳에서 군대의 문화가 통용되고, 자신의 언행이 거기에 물들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학교가 군대여야 했던 시절, 교정에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은 군대와 사회가 정상적으로 분리된 오늘을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 오랜 학습을 통해 몸에 익은 왜곡된 문화를 극복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은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병에, 사회는 일사분란을 앞세운 갑질과 공동체의 구성원을 적으로 표현하는 막말에 시달리게 된다.

혹 지금 대한민국 안에 적들이 창궐하여 내전상태라 생각한다면 어설픈 군대문화를 입으로만 시전하는 건 비겁하다. 왜 적들과 함께 세금을 내고 같은 군대에 자식을 보내며, 그들과 표를 다투고 여론조사에 함께 이름을 올리는가? 왜 댓글 창과 SNS를 망언으로 도배하고 가짜뉴스에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가? 가짜 군복을 입고 광화문을 누비는 일부 어르신들이 차라리 더 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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