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와 ‘너’의 결합이다. ‘나’보다 ‘우리’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좋게 해석될 수 있다. 이기적이기보다 공동의식과 공동의 운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내 집’, ’나의 가족’, ‘내 나라’는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나라’라고 해야 따듯한 피가 흐르는 것이다. 심지어 ‘내 아내’라고 해야 할 것을 ‘우리 아내’라고 쓰기까지 한다. 영어로 직역하면 ‘our wife’가 되는데도 말이다.

‘우리’라는 말이 유명하게 쓰인 예가 있다. “우리가 남이가!”이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1주일 앞둔 12월 11일, 부산 남구 대연동 복어 요리 집인 초원복국에 당시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부산, 경남, 경북까지 요렇게만 딱 단결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면서 ‘우리가 남이가!’를 부르짖었던 사건이다. ‘나’와 ‘너’의 완전한 결합체 ‘우리’의 가장 좋은 용례다.

‘우리’라는 말은 종종 이렇게 편을 가를 때 자주 사용된다. ‘내 편’보다 ‘우리 편’이 되는 것이다. 다른 편은 모두 대적해야 할 상대 편이 되는 것이다. 독재자들은 일인칭을 많이 사용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연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담화에서도 ‘나’란 말이 많이 사용됐다. ‘우리’보다 ‘나’를 강조하는 데서 독재주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즐겨 쓰면 더 민주적일까. ‘나·자아’ 없는 ‘우리’는 전제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어령 박사가 얘기했듯이 한국의 비극은 태반이 ‘나’를 찾지 못한 데에 있었다. ‘내’가 ‘우리’ 속에 매몰된 전제주의였다고 했다. 이어령은 “개 목걸이처럼 운명이라든지, 혈연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하는 것에 끌려 다니며 살았던 것이다”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우리 윤 총장님”이라며 “청와대든 정부든 또는 집권 여당이든 비리가 있다면 엄정하게 임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우리’라는 단어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지난 정권 때 마다 검찰이 ‘권력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지 않은 적이 없다. 막 진영을 갖춘 윤 총장은 ‘파사현정(破邪顯正), ‘목걸이’ 같은 ‘우리’에도 항상 주목해야 한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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