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인협회장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인협회장

한반도가 하나의 통일된 국가체제를 갖추기까지 수많은 전쟁이 펼쳐졌다. 그중 신라의 통일전쟁은 자국의 낮은 입지를 만회하기 위한 몸부림과 같은 것이었다. 고구려, 백제라는 주변 국가의 융성에 치인 신라가 이를 갈고 속을 썩인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는 642년 신라의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하는 등 신라를 위기감에 휩싸이게 했고, 신라는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 고구려와 왜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때 삼국통일의 주인공 신라 김춘추(金春秋)가 648년 당으로 가 당 태종(太宗)과 나당동맹을 체결했다.

두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쳐부수고, 그 차지한 땅을 대동강 기준으로 북쪽은 당,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자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소정방을 보내 나당연합군을 형성했고, 그 결과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당초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역에 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우리를 통째로 지배하려고 야욕을 드러냈다. 신라로서는 기막힐 노릇이었다. 여우를 피하자 범을 만난 꼴이 됐다. 지금까지 흉금을 털어놓고 연합했던 동지를 적으로 삼아야 했다.

이에 따라 신라는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당나라라는 골리앗과 새로운 전쟁을 치러야했다. 그 과정에 문경 당교대첩이 등장한다. 역사적 직접기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전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전설치고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와 지명들이 지금까지 1,500여 년 동안 전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당교(唐橋)’다. 문경 시내를 가로지르는 반제이 도랑을 건너는 다리다. 삼국유사에 ‘신라고전에는 정방이 이미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에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병을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상주의 경계에 당교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곳이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당교는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 계획을 알고, 당의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 당교라고 이름 지었다’고 기록했다.

반제이 도랑의 ‘반제이’도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할 때 이곳 당교가 있는 도랑에서 반전(反轉)했다는 데서 유래한다는 지명유래가 있다. ‘반전’이 ‘반제이’로 음이 변했다는 것.

‘불바다’도 당나라 군사가 지금의 문경시청 앞 벌판에 진을 치고 밤에도 불을 훤히 밝혀 바다를 이룬 듯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공평동 ‘표석골(表石谷)’은 김유신 장군의 당교 전투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는 곳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당나라 최고의 장수인 소정방의 군대를 맞아 지금의 모전동 일원에서 맞서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리하여 문경에서는 1990년 문경시청 앞에 ‘당교사적비’를 세워 이곳 주변에 모여 있는 이야기와 지명들을 한 곳에 모아 기록했다. 이웃 상주시도 문경과 상주 경계에 ‘당교사적비’를 세웠다. 당교가 옛 문헌에 ‘상주’로 기록돼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문경 출신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당교(唐橋)가 소재한 문경의 모전동과 상주 함창 지역은 신라 수도 경주에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거나 백제로의 진출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정도로 전략적 비중을 지닌 곳이었다. 그러한 추정은 신라의 백제 정벌 시 그 왕도인 부여 침공을 겨냥한 태종무열왕의 동선을 통해서 알게 된다. 즉 태종 무열왕은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해당하는 남천정(南川停)에 행차한 후 다시금 회군하여 지금의 백화산성인 상주 금돌성(今突城)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한 데서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한반도에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루는 과정의 정점에 문경이 있고, 당교대첩(唐橋大捷)이 있다. 단순한 전투가 아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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