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교사 양성대학에서 근무하는 관계로 아주 가끔씩이나마 교과서(초등) 편찬에 관여할 때가 있습니다. 전공이 국문학이니 국어교과서 ‘연구진’이나 ‘검토진’에 이름을 올릴 때가 있습니다. ‘집필진’ 쪽에서 그런 식의 참여를 제안해 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늘 ‘내부 고발자’의 입장에 섭니다. 나이 든 전공자 입장에서 교과서 문학 제재가 교육 목표에 맞게 제대로 취택(取擇·가려서 골라 뽑음)되고 있는지를 주로 살핍니다. 간혹은 교과서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들의 적절성, 적법성도 심사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가 늘 아쉽게 여기는 것은 우리나라 교과서 집필자들(물론 제가 아는 것은 국어교과서에 한정된 것입니다만)의 비전문성입니다. 적어도 국어교과서 집필자라면 우선은 스스로 언어 기능에 숙달된 인물들이어야 하고 오랜 기간 그 방면 교육활동에 종사해 온 경력자들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를테면 ‘책(말)으로 배워서 아는 것’이 ‘스스로 깨쳐서 (몸으로) 아는 것’보다 월등히 많은, 젊고 미숙한 이들이 주로 교과서 집필자로 활동합니다. 그러니 문학 제재를 고를 때에도 좌고우면(左顧右眄), 코드(주제나 구성이나 문체 등)나 맥락(문화적, 역사적 생성배경)을 두루 살펴서 그 교육적 활용도를 충분히 가늠하지 못하고 되는대로(눈에 띄는 대로) 아무것이나 가져다 습니다. 언어가 지닌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적확하게 파악해서 아이들에게 ‘진짜 말’을 가르치는 것은 아예 언감생심입니다.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이 언어생활입니다. 인간은 그런 정교한 ‘언어 영역’을 배우면서 사회성도 기르고 심미성(審美性, 아름다움을 찾는 경향)도 알아 갑니다. 단순한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됨의 품격을 조성해 내는 핵심적인 정신활동이 바로 ‘언어’입니다. 시나(시인이나) 소설이(소설가가) 존중받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늙은 말에게 길을 묻는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늙은 말은 노쇠하여 큰 짐을 지지는 못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알고 있습니다. ‘늙은 말’을 앞세우면 어디서나 행로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늙은 말’ 입장에서, 제가 생각하는 교과서 집필기준은 대략 이렇습니다. ①꼭 가르쳐야 될 것만 싣는다(최소의 분량, 최적의 제재, 최고의 수준). ②가르치는 방법에는 관여 않는다. ③집필자들에게는 마지막 저서가 된다. 이 세 가지 기준만 만족시키면 교과서가 오늘처럼 동네북 신세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최소의 지식, 그렇지만 활용 가능성이 높은 지식, 그리고 오류가 없는 지식이 교과서에 실려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교사의 몫(자율적 수업 활동)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런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전문가들을 고르는 것이 마지막 남은 숙제입니다.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의 교육 경력(30년 이상)과 충분한 저술 경험(10권 이상)이 있는 사계의 전문가와 명망 있는 시인, 소설가들을 두루 교과서 집필자로 초빙해야 할 것입니다. 고작 경력 10년 안팎의 젊은 교사들을 동원해서, 마치 돈내기 식으로, 교과서를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됩니다.

어설픈 전문가들이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 법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초등교육계는, 특히 교과서 편찬과 관련해서는, 배가 이미 산 중턱쯤 올라가 있는 상황입니다. 교과서 부피부터 확 줄여야 합니다. 교과서를 두텁게 만들지 말고 교과교육과 관련된 실천적 교사 교육을 다양하고 깊이 있게 실행해야 합니다. 교사가 교과서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책 속에는 길이 없습니다. 길은 오로지 사람 안에만 있습니다. 미숙한 자들의 생각 안에서 만들어지는 ‘계획과 예상되는 성과’는 사막의 목마른 자들이 종종 만나는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아는 것이 실천을 면제한다는 ‘헛것 생각’의 소산입니다. 모두 ‘산 중턱에서의 노 젓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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