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51. 구미 낙봉서원
[서원] 51. 구미 낙봉서원
  • 하철민 기자
  • 승인 2019년 08월 07일 17시 31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8월 08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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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덕행' 스승의 가르침 몸소 실천하며 바른길로 인도하다
서원 전경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에 있는 낙봉서원은 1647년(인조 25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숙자(金叔滋)·김취성(金就成)· 박운(朴雲)· 김취문(金就文)· 고응척(高應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787년(정조 11년)에 ‘낙봉(洛峰)’이라고 사액돼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낙봉서원 현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가 그 후 1933년에 강당을, 1943년에 외삼문을, 1977년에 사당을, 1989년에 동재를, 1990년에는 서재를 다시 지어 복원했다.

낙봉서원은 매년 3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 4두(豆)이다. 유물로는 위패가 봉안된 선조들의 문집 판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각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강학당
◇서원의 배치.

낙봉서원은 낙성리 마을 뒤쪽 경사진 언덕 위에 야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앉아 두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아래쪽 구역은 강학공간으로 외삼문을 들어서면 마당 좌 우측에 동·서재가 마주 보고 있으며, 그 뒤편 높은 축대 위에는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위쪽 구역은 제향공간으로 앞쪽에는 내삼문이 있고 그 뒤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 뒤편에는 묘단이, 앞쪽 오른편에는 비각이 있다.
상덕묘
사당 ‘상덕묘’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정면에는 굽널을 높게 한 쌍여닫이 굽널띠살문을 달고 나머지 세면은 벽으로 구성했다. 내부 바닥에는 전을 깔았는데, 전 바닥은 상대 건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눈길을 끈다.

원형으로 다듬은 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그 상부를 초익공계로 꾸민 3량가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익공 쇠서 윗면은 연화각하고 그 위에 봉두를 보머리에 끼웠다.

강당은 중앙 2칸에 대청이 자리잡고 그 좌우에는 온돌방이 놓여 있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들이고 우측에는 쪽마루를 시설했으며, 좌측방 뒷벽에는 뜬벽장을 두었다.

대청과 양측방 사이에는 정자살 불발기를 넣은 맹장지 4분합 들문을 달아 필요시 공간을 확장하거나 구획할 수 있게 했다.
외삼문
막돌 초석 위에 정면에만 원주를 세워 그 상부를 무익공으로 꾸몄는데, 상부에는 첨차형 부재 양단에 소로를 얹어 장혀를 받게 하고 창방을 두지 않았다.

대청 상부 종량 하부에는 제형으로 상부는 원형으로 모양낸 판대공을 세웠으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동·서제는 구조가 동일한 대칭적 구성의 건물로 각기 정면 3칸, 측면 1칸의 3량가 장혀수장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이뤄져 있다.

비각은 단칸 건물로 원형 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네 면에 홍살창을 꽂았다. 기둥 상부는 이익공계로 꾸미고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얹었다.

외삼문은 문만 두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중앙문 양측에 온돌방을 두고 그 전면담 바깥쪽에 쪽마루를 시설해 이채롭다.

◇배향인물.

△김숙자(金叔滋)는 본관은 선산(一善).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12세 때부터 야은 길재(吉再)로부터 소학(小學)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역학에 밝은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周易)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고령 현감을 거쳐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됐다. 그 뒤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1456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해에 죽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해금 잇게 했다.

효성이 지극해 소학(小學)의 법도를 따라서 어버이를 모셨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해,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가르칠 때는 처음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킨 다음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그다음에 효경(孝經)· 사서오경(四書五經)·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았다.

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길재에게서 물려받았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김취성(金就成)은 본관이 선산(善山)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김광좌(金匡佐)이며, 어머니는 임씨(林氏)로 임무의 딸이다. 일찍이 박영(朴英)의 문하에 들어가서 중용과 대학의 깊은 뜻을 배워 존심양성의 방법과 관물성찰의 묘지를 터득하고, 무극과 태극의 묘용을 배워 그 이치를 깨달았으며 한평생을 학문탐구에 몰두해 일가를 이뤘다.

만년에는 당시의 대학자이며 재상이었던 김정국(金正國)과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네 차례나 참봉에 제수됐으나, 모두 사직하고 한번도 부임하지 않았다. 또한, 의학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함으로써 약성과 경락에 대한 지식이 깊어 병든 사람을 많이 치료했는데, 그 수가 무려 수천인에 이르렀다고 한다. 저서로는 ‘진락당집’이 있다.

△김취성보다 18세 어린 김취문은 맏형의 인도를 받아 공부를 시작했고, 그의 추천으로 송당에 입문했으며, 20대 후반 이미 송당학파의 고제로 인정받은 재사였다. 그는 1537년(중종 32) 별시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해 형조좌랑과 예조좌랑을 역임했다.

이후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으로 나가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냈다. 1544년 강원도도사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수찬을 지냈고 1547년(명종 2) 호조정랑과 공조정랑을 역임했다. 이어서 전라도도사·영천군수·청송부사·상주목사·나주목사·성균관사성·사헌부집의·호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구암집(久庵集)’이 있다.

△박운(朴雲)은 효심이 남달라 40년간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항상 곁에 모시고 손수 시중을 들었고, 늙은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애절한 마음이 하늘에 사무쳐 3년 동안 묘 옆에 띠 풀을 이은 집을 짓고 나물죽만으로 연명해 시묘의 정성을 다했다. 또한 시묘가 끝난 뒤에도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해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참배를 드리며 ‘부모님의 마음을 위하고 은혜를 항상 잊지 않은 것이 자식의 도리이며 곧 효도이다.’라는 공자의 말을 몸소 실천했다.

1580년(선조 13) 7월 현재의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 고리실에 박운 효자정려비가 세워지고 정려각이 건립되었다. 정려각 현판에 ‘효자성균진사박운지려(孝子成均進士朴雲之閭)’라 쓰여 있다.

△두곡 고응척(高應陟·1531~1605)은 해평 문량에서 태어나 김범(金範)의 문인으로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 1561년(명종 16)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이듬해 함흥교수로 부임했다가 1563년 사직한 뒤 시골에 묻혀 도학을 연마했다. 1595년 풍기군수에 이어 회덕현감, 강원도사·경상도사를 거쳐 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고 다시 낙향했다가 1605년 경주부윤에 부임, 곧 사직했다.

‘대학’의 여러 편을 시조로 읊어 교훈시를 만들고, 사상을 시·부·가(歌)·곡(曲)으로 체계화했다.

(자료도음)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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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철민 기자 hachm@kyongbuk.com

중서부권 본부장, 구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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