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학교 교양학부·철학 교수
손화철 한동대학교 교양학부·철학 교수

90점을 받아온 아이에게 흔쾌히 “정말 잘 했다. 넌 천재구나!”하고 말하는 부모는 좋은 부모다. 그 뒤에 “그런데 뭘 틀렸니?” “친구는 몇 점 받았데?”하고 물어서 다 망쳐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100점을 받아와도 “방심하지 말고 계속 열심히 해서 다음에 또 100점 맞아!” 하는 지칠 줄 모르는 닦달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억척이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잘해도 칭찬하면 안 되고 성공해도 만족하면 안 된다고 배운다. 칭찬하고 만족하는 순간 느슨해져서 미래를 망칠 것이란 걱정 때문이다. 우리는 낙관을 비관한다.

섣부른 낙관을 삼가는 것은 지혜롭고 점잖은 일이지만, 지나치다는 게 문제다. 뭔가 위험의 조짐이 보일 때 최악의 상황을 곧바로 상상하고, 우리에게는 대처할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주장하며, 위험을 극복할 가능성을 희박하게 묘사한다. 물론 위험을 극복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극복의 의지를 묘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위기의 정도를 최고도로 표현해서 절박한 마음으로 상황에 대처하게 하려는 기대가 숨어 있다. 가망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다 뽑아내야겠다는 극약처방이다. 이런 사고는 비관에 대한 낙관이라 할 수 있겠다.

낙관과 비관을 이리저리 연결해서 싸매어놓는 섬세하고도 복잡한, 보기에 따라서는 엽기적인 사고방식이 지난 몇십 년간 우리를 지배해 왔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나라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인식이 습관적이어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도 없다. 위기의 내용이 무엇인지, 위기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모두 자신의 극약처방이 맞다며 상대의 극약을 비난한다.

일본이 자신들의 수출을 스스로 규제하겠다는 희한한 공격을 개시했다. 팔 물건이 있어도 우리나라에는 좀 천천히 팔겠다는 것인데, 각자 잘 만드는 것을 만들어 교환하면서 제품을 만들어야만 하는 최첨단 기술의 시대에 어처구니없는 몽니다. 홀로 손해를 감수하면서 버티다 보면 돌고 도는 어음이 중간에 막힌 것 같은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가 비난과 우려를 쏟아내고 일본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나는 이유다.

모두가 우려하는 사태의 핵심은 예측 가능하던 미래가 불확실의 상태로 바뀐 것이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낙관에 대한 비관, 비관에 대한 낙관이 고개를 든다. 우리 언론과 전문가, 정치인들은 날마다 최악의 상황을 언급하고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 아마 힘들어질 거라고 경고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이런저런 정책들도 나오지만, 그에 대한 비판은 거의 경쟁적이다. 사태를 안일하게 본다거나 미리 준비를 안 했으니 이젠 힘들다는 식의 절망적인 언급도 끊이지 않는다. 그나마 우리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덕담 뒤에는 항상 “그러나 방심은 금물입니다”가 습관처럼 따라 붙는다.

걱정이 많은 것은 애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방심은 금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상한 동물이어서, 자꾸 위험하다고 하면 경각심을 가지기보다 안전불감증이 커지고, 너도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하면 없던 힘도 생긴다. 지난 몇십 년 동안 국가와 가정의 다양한 수준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위험 경보가 과연 긍정적이기만 했는가? 남이 잘못해서 우리가 함께 어려움을 겪는 오늘, 최악의 상황에 대한 비관보다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을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대책을 불문하고 힘들다고 되뇌는 것보다 과거에 이겨냈던 어려움을 기억하며 서로 다독이고 진심으로 격려하는 것이 먼저다. 낙관을 애써 낙관하자. 습관적 비관은 너무 비관적이다. 우리는 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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