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2019년으로부터 4252년 전 그해 10월 3일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나라를 세웠다. 나라를 세운 것과 관련 경축은 그날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독립 그날을 경축이라니 그것도 우리의 힘이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게 일본이 항복 그래서 한 독립을 두고 경축을.

독립의 원인이 된 1910년 8월 29일 섬나라 왜구에게 국권을 빼앗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불행한 일이 있기까지는 조선시대 선조와 고종의 무능이 원인이다. 선조 때는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두 명의 왕후 그리고 여섯 명의 빈이 선조를 둘러싸고 권력다툼을 그런 가운데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또 고종 때는 민비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권력을 두고 격돌한 가운데 무능한 왕으로 그도 부족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여 스스로 황제행세를 했다. 그의 무능은 그것으로 그치지를 않았다.

일제는 1907년 7월 19일 고종을 강제 퇴위 순종을 즉위시키고 7월 22일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통감부가 장악했다. 그리고 7월 24일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 차관으로 임명하고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또 7월 27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제정했으며 7월 31일 대한제국 군부를 폐지하고,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자 1904년에 항일의병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의병활동이 확산되자 일제가 1909년 완전병탄정책을 강화 일진회 송병준 등에게 한일합방을 제창토록 했다. 초대 통감 이토가 그해 4월 10일 한국을 식민지로 합병결정 7월 6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 의결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9월부터 2개월간 일본군이 한국 의병들을 토벌 항전을 종결시키고 병탄을 마감했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의 이토가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를 만나 한국병탄과 만주문제협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의병장 안중근이 그를 사살했다. 뒤이어 그 해 12월 2일 한국의 친일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애국청년 이재명의 습격으로 중상 집무 불능 상태에 빠졌다.

1910년 3월 26일 일제가 안중근을 처형하고 서둘러 한국병탄을 강행했다. 그리고 6월 24일 박제순 내각을 강요 한국 치안업무를 일제에 완전히 위탁하는 협정을 체결 통감부가 경무총독부를 설치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통감부는 헌병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임하고, 지방 헌병대장이 각도 경찰부장을 겸임, 헌병경찰을 대폭 증강 대한제국의 한국인 경찰과 일본인 경찰, 일본인 헌병, 한국인 헌병보조원, 일본군인 2개 사단을 전국 각지에 거미줄같이 배치, 한국인의 반항을 탄압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3대 통감 데라우치가 일본 수상으로부터 병합조약은 물론, 병합 후 통치방침까지 지시를 받고, 한국에 온 후 언론 봉쇄를 위해 ‘대한민보’ 발행을 정지시키고,‘대한매일신보’를 판매 금지시켰다. 그리고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을 통감관저로 불러 병합조약을 비밀리에 의논한 뒤, 8월 18일이완용 내각을 출범 1910년 8월 22일 순종을 참석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 이른바 한일병합 안건을 이완용 내각이 결의했다. 그 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통감 데라우치의 명으로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됐다.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을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 발표했다. 그로써 우리민족에게 36년이라는 일제식민통치와 독립이라는 불행이 시작됐다. 그런 날을 경축해야 하는지?

국제사회에서 양심을 기대하는 것 바보짓이다. 비록 경제문제라고는 해도 일본이 전쟁을 선포했는데도 방관 포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대단히 잘 못된 행위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중론을 모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8·15 광복 그 같은 날이 또다시 이 땅에 이 민족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 광복을 경축? 과연 그런 것일까? 8·15 광복은 경축이 아닌 상기(想起)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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