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인간은 말로 흥하고 말로 망하는 존재입니다. 큰일을 도모하는 자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크게 한 번 포부를 펼쳐보려다 말 한마디, 문장 한 구절 때문에 좌절한 역사적 인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정적(政敵)들에게 말 한마디가 꼬투리 잡혀 몰락하는 경우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보는 정치의 현실입니다. 그 반대도 물론 많습니다. 역사의 위인(偉人) 치고 귀감이 되는 말 한마디 안 남긴 사람이 없습니다. 성공한 역사적 인물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주로 그가 한 말을 떠올립니다. “저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와 같은 충무공의 말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말’과 행적이 완연하게 일치를 이루었을 때 그들이 남긴 말은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를 본받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이른바 수행성(遂行性·performativity)의 금과옥조가 됩니다.

요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음(陣中吟)’에 나오는 한 구절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바다에 다짐 두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에서 나온 ‘서해맹산(誓海盟山)’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목숨을 바쳐서 기필코 왜적을 물리칠 것을 다짐하는 충무공의 결기가 담긴 시구(詩句)입니다.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조국 후보자가 이 말을 인용해서 “서해맹산의 정신으로 공정한 법질서 확립, 검찰개혁, 법무부 혁신 등 소명을 완수하겠다.”라고 밝히면서 유명해진 말입니다.

인간이 천지자연을 두고 맹세를 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걸핏하면 하늘을 두고 맹세해 왔습니다. 너무 남발되어서 ‘하늘’의 신용도가 많이 떨어진 느낌마저 듭니다(이순신 장군도, 농담입니다만, 하늘은 빼고 바다와 산에만 맹세를 합니다). 하늘만 신용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맹세를 어긴 인간이 너무 많다 보니 인간들의 ‘맹세’ 자체가 아주 형편없는 신용도를 보입니다. 맹세가 잦을수록 인간과 그의 말에 대한 신용이 오히려 감소될 뿐이라는 것을 일찍이 간파한 공자님은 “기필(期必, 꼭 이루어지기를 기약함)하지 마라”라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말을 앞세워서 될 일이라면 아예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가능성이 없어) 그저 말만 앞세울 것이라면 그 또한 아니함만 못할 것이니 기필할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의 맹세가 가치 없는 것임은 예나 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순신의 ‘서해맹산’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인간의 맹세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어룡(魚龍·바다 생물의 총칭)과 초목(草木)과의 맹세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그의 맹세를 듣지(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장군은 천지자연의 말 없는 생물들에게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켜냅니다. 그들 어룡과 초목들이 장군의 맹세를 기꺼이 용납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장군의 맹세가 인간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한목숨에 연연하는 그런 ‘말뿐인’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수 왜적들을 섬멸할 수만 있다면 내 한목숨 기꺼이 바치리(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라고 이어지는 결구가 그들의 호응을 불러낸 것입니다. 과연 장군은 그 맹세를 지킴으로써 인간을 넘어 바다와 산의 영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바다와 우리 땅. 우리 하늘과 우리 핏줄을 지켜내셨습니다. ‘서해맹산’이 한 공직 후보자의 입을 통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에 전율을 느낍니다. 그만큼 지난한 국가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의 함대는 여전히 우리 바다에 태산처럼 포진하고 있습니다. 바다와 산을 움직일 맹세 하나는 꼭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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