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52. 봉화 삼계서원
[서원] 52. 봉화 삼계서원
  • 남현정 기자
  • 승인 2019년 08월 14일 18시 02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8월 15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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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항거하며 직언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선비의 기상 가득
삼계서원
황금 닭 마주하며 알 품는 금계포란(金鷄抱卵) 명당으로 이름 높은 봉화군 유곡리 닭실마을에 삼계서원(三溪書院·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17호)이 있다.

수백 년 세월 충재 권벌(1478~1548) 선생 가문의 집성촌으로 이어진 마을은 석천정사, 추원재, 청암정 등 소중한 유교문화유산과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삼계서원 현판
△삼계서원(三溪書院)

닭실마을로 오르는 옛길 초입부분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중종대 명신 충재 권벌(1478∼1548)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21년(1588)에 건립됐다.

선조 31년(1601)에 한강 정구(鄭逑)가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당호를 정일당(精一堂), 동재를 사무사(思無邪), 서재를 모불경(母不敬),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 각각 명명했다.

현종 1년(1660)에 삼계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고종 5년(1868)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충정공사·환성문·관물루가 훼철됐다가 1951년에 복원했다.
삼계서원 사당
충재 권벌 선생 19대 종손 권용철(47·봉화문화원 사무국장)씨는 “실제로는 1960년도에 복원됐다고 전해온다. 실제 6·25 전쟁중에 서원복원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서원의 배치는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삼계서원 정일당
서원 출입은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중층의 관물루 아래에 설치된 환성문으로 들 수 있도록 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강당이 자리하고 전면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강당 우측으로 돌아들면 담장으로 공간이 구분된 제향공간으로 권벌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사당 충정사가 자리한다.
신도비
동재 전면 우측에는 1906년 사림에서 세웠다는 신도비와 비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 관리사가 있다.

2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다가, 2013년도부터 양력 3월 두 번째 일요일 낮으로 변경해 지내고 있다.
삼계서원 문루
권용철 씨는 “과거 문루를 복원할 때, 나무를 구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서원의 권위도 세우고자 시멘트로 높은 문루를 지었었는데, 최근 문화재 복원과정에서 기존의 구설에 전해오는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문루로 복원돼 미관상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충재 권벌 (1478~154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훤정·송정’이다.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했다. 사헌부지평 재임 시, 당시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해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다.

예조참판 당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왕도정치를 주장하면서 훈구파들과 충돌할 때 두 세력의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다가,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직 귀향했다. 이후 15년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복직돼 이후 인종 1년(1545) 의정부 우찬성이 됐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됐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과 참찬관(參贊官) 등을 역임하며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다.

중종 대에는 조광조,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호사림 중심으로 추진된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독서를 좋아해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으며, 저서로는 ‘충재문집’이 있다.

닭실마을
△닭실마을

봉화군 봉화읍에 위치한 전통마을로 명칭은 사적 및 명승 제3호 ‘내성 유곡 권충재 관계 유적’이다.

권용철 씨는 “고유명칭은 ‘달실’이지만, 국어 표준어 적용으로 ‘닭실’로 이름이 변했다”며 “약 500여 년 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 권벌(1478~1548)선생께서 마을에 입향한 후 후손들이 지켜오는 안동 권씨 집성촌”이라고 설명했다.

전형적 배산임수 지형인 마을은 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아 ‘충절의 마을’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다.

‘닭실’이란 명칭은 금계포란(金鷄抱卵), 즉 황금 닭이 알을 품은 지형으로 붙여졌다.

마을 뒤 암탉 형상의 나지막한 산이 포근하게 마을을 안에서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외풍을 막아주는 수탉의 형태를 지닌 낮은 산이 밖에서 감싸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지형을 갖췄다.

권용철 씨는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삼남의 ‘사대길지(四大吉地)’ 중 한 곳으로 지정된 곳”이라며 “충재종가, 충재박물관, 청암정, 석천정사, 석천계곡 등 많은 유적과 유물 빼어난 정자 등이 산재해 있다”고 말했다.박문산 기자 parkms@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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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정 기자 nhj@kyongbuk.com

유통, 금융, 농축수협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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