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 167명, 기록 없어 유공자 인정 못받아
봉화 척곡교회 김종숙·정용선 선생 항일운동 불구
후손들 "정부가 없앤 기록 어디서 찾나" 답답함 토로
4년째 '음악의 밤' 열어 독립운동 기억 되새겨

근대문화유산 봉화 척곡교회

올해는 광복 제74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뜻깊은 해이지만 미발굴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아직도 한이 풀리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에 투신했음에도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독립 운동가는 1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나 유공자로 인정된 건 단 1만5000여 명에 불과하다. 이중 일제강점기 수형자는 현재 전국적으로 2000명이 넘는다. 경북·대구에만도 167여 명에 이른다. 이들 후손들은 기록을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런 예우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척곡교회 김영성(95) 장로

경북 봉화군 법전면 산골 오지마을 척곡리에 근대문화유산인 척곡교회가 100년 풍상을 견뎌내며 옛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이 교회는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지금의 재경부) 관리(당시의 주사)를 지낸 김종숙(1956년 소천) 목사가 세웠다. 예배당과 함께 교육시설인 ‘명동서숙’은 원형을 보존한 채 현재 손자인 김영성(95) 장로 노부부가 지키고 있다.

예배당과 명동서숙

첩첩산중 오지에 교회가 세워진 데는 이유가 있다. 김종숙 목사는 당시 일종의 외교관 양성소 과정을 마치고 참의 승진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에 감흥을 받아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처가가 있던 봉화 법전 유목동으로 낙향해 척곡교회를 세우고 선교와 교육 그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봉화지역은 의병들이 봉화군청을 불태우자 춘양면으로 군청을 이전하는 등 의병활동이 활발했고 그 중심에는 척곡교회가 있었다.

해방직전 척곡교회 교인들. 당시 김종숙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봉화경찰서에 3개월간 투옥되고 8월 16일 출소했다.

김 장로는 어릴 적 명동서숙에서 공부하면서 할아버지의 신앙과 독립운동을 지켜봤지만 목회보다는 교육을 택했다. 교장으로 평생 몸담았던 교직을 정년퇴직한 뒤 부인과 이곳에 내려왔다. “척곡교회를 잊지 말라”는 부친의 유언이 귀에 맴돌아 결국 교회 지킴이가 된 것이다.

1918년 무렵엔 이 교회는 120명이나 모여 예배를 보았을 정도로 번성했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앞장섰던 할아버지가 일경의 탄압을 받으면서 명동서숙은 폐교되고 결국 신자들도 흩어지게 됐다. 김 장로의 마지막 바람은 교회 개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싸우러 나가세.”

100여년 전 일제강점기 당시 광복군의 대표적 노래 ‘독립군가’가 척곡교회에서 울려 퍼진다. 김 장로는 100년 넘게 역사와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척곡교회가 8월 29일 경술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사비를 털어 ‘나라사랑 음악의 밤’ 행사를 마련했다.

올해 4회째인 이 음악회에는 이 교회 역사와 함께한 독립운동가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 병기 씨, 독립유공자 김명림 선생의 손녀 인숙 씨, 김약연 선생의 증손자 재홍 씨, 김종숙 선생의 손자 김영성 장로가 매년 함께 참여해 서로의 애환을 달래고 있다.

특히 정용선(1883~1928) 선생의 증손자 정병기(62) 씨는 증조부의 독립 유공 인정을 위해 42년째 고분고투 중이다. 올해도 공훈심사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정 씨는 “정부가 기록을 없애놓고 이제 와서 그 자료를 요구하면 어떡하느냐”고 개탄했다. 국가보훈처에서 요구하는 판결문 등 객관적 자료들이 지난 1981년 1월7일 정부에서 문서정리주간실시계획공보 명목으로 폐기 처분됐기 때문이다.

경성형무소 표지석

김영성 씨에 따르면 “정용선 선생을 비롯한 석태산 의병장, 김명림 선생 등은 관공서 습격·방화 등으로 일본 헌병·경찰에게 수차례 추격을 당했다”며 “석태산 의병장은 피신 중 소백산에서 체포돼 현장에서 일경에게 처형당했다. 함께 체포된 정용선 선생은 경성형무소로, 김명림 선생은 대구형무소로 보내졌다. 김명림 선생은 대구형무소에서 10년을 복역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다행히도 김명림 선생만 대구형무소 기록이 남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 정병기 씨

정병기 씨는 증조할아버지 산소가 없는 사실을 알고 고교 졸업 후부터 관련 기록을 찾으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봉화군 사무소에서 어렵게 찾은 호적에서 증조부 정용선 선생이 1928년 5월 20일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이를 근거로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수없이 했지만 ‘수형인 명부’ 같은 증빙자료가 더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동네 원로들의 인우(隣友)보증서도 제출했으나 소용없었다. 정부기록보존소·국사편찬위원회부터 주미·주일 한국대사관까지 자료를 요청했지만 수형인 명부나 판결문은 없다는 답변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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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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