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광복절을 보냈다. 올해는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광복절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와 닿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친 독립유공자들의 희생과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날이었다. 기록이 남아 있어서 선조가 독립 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후손들이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더구나 아직도 인정 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난 보다 가슴 속에 한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활동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가난하다’는 말이 있고,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발굴과 정리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제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는 1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유공자로 인정된 것은 1만5000여 명에 불과하다. 추정치의 10분의 1 수준이다.

아직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일제 강점기 수형자는 전국적으로 2000명이 넘고, 이 가운데 경북과 대구지역에만 해도 167명에 이른다. 이들의 후손은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예우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북 봉화 법전면 오지의 척곡교회를 세운 김종숙 목사(1956년 소천)의 경우다. 봉화군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했는데 그 중심에 척곡교회가 있었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앞장섰고 명동서숙을 세워 교육사업을 펼쳤던 김 목사는 일경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 유공자 발굴사업을 시작해 현재는 1만 5000여 명이 지정됐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독립 유공자들이 허다하지만 제대로 된 발굴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척곡교회 김종숙 목사의 증손자 김영성씨는 당시 봉화군 독립운동에서 정용선 선생을 비롯해 석태산 의병장, 김명림 선생 등은 관공서 습격·방화 등으로 일본 헌병·경찰에 수차례 쫓겨 다녔고, 석태산 의병장은 피신 중 소백산에서 체포돼 현장에서 일경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 정병기씨는 증조부의 독립유공 인정을 위해 42년 째 공훈심사 시청을 했지만 거절 당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되면 후손들에게는 월 45만 원~290만 원이 지급된다. 하지만 그것도 후손들 가운데 단 1명만 인정된다. 독립유공자와 후손의 74.2%가 월 소득 200만 원도 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아직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지원금이 아니라 명예의 인정 만이라도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한 사람의 독립유공자도 더 발굴해 후손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선조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보훈처가 나서서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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