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 앞바다서 만난 태풍 속에서 만난 '식민지 피의 현실' 정면으로 맞서

이육사 시인.
이육사 시인.

나는 지금도 그 바다를 잊을 수 없다. 육사의 흔적을 쫓아 2017년 2월 7일 저녁 포항 송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송도 앞바다는 포항제철의 철골 구조물에 막혀 있었지만, 저녁노을이 아름다웠다. 이튿날 아침 날씨는 청명 상쾌했다. 숙소에서 나와 송도 해변으로 걸어가는데 길옆에 남아 있는 소나무 숲 속에 ‘미해병대 제1비행단 전몰용사충령비’, ‘포항지구 전투 적비’ 등 6·25 관련 비가 있었다. 도로를 넘어 해변으로 가자 송도해수욕장의 상징인 ‘평화의 여신상’이 월계수를 들고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곳은 이육사의 문학적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 곳에 육사 관련 기억 장치가 필요하다는 열망으로, 그날의 육사와 그 내면을 소개한다. 

△1936년 7월 29일 저녁 포항 도착(송도원은 30일)

육사가 언제 무슨 일로 포항 송도 앞바다에 왔는지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그와 친구들의 각별한 우정(友情) 덕분이다. ‘그림1~2’는 이육사가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이다. 보낸 사람은 ‘慶北 浦項 幸町 徐起源方 陸史弟’. 육사가 포항에서 머문 곳은 친구 서기원의 집(徐起源方). 육사의 포항 친구 서기원은 해방 이후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장을 역임했고, 육사의 딸 이옥비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으며, 1968년 낙동강변의 ‘광야 시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1936년 육사가 머문 그의 집 주소는 포항 사이와이초(幸町). 엽서에서 언급한 바에 의하면 송도원 해안(海岸)까지는 30정(町), 3km 남짓이며, 버스가 있었다.  

육사는 다보탑이 그려진 엽서를 절친 시우(詩友) 신석초에게 보냈다.
육사는 다보탑이 그려진 엽서를 절친 시우(詩友) 신석초에게 보냈다.

위 엽서를 받는 사람은 "신응식(申應植) 아체(我체)". 신응식은 신석초 시인의 본명. ‘체(체)’는 아가위나무로 ‘시경’, ‘상체(常체)’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형제간의 아름다운 우애를 상징한다. 그러니 ‘아체’란 나의 형제라는 말이다. 엽서에 의하면 이육사는 7월 20일경, 서울을 떠나. 대구에서 1주일 정도 귓병을 치료하고, 7월 28일 경주에서 1박했고, 29일 불국사 관람하고 포항 친구 서기원의 집에 온 것이다. 

엽서의 소인 ‘11.7.30’은 소와(昭和) 11년 즉 1936년 7월 30일. 이날 아침, 포항 송도원 앞바다는 아름다운 날씨로 육사를 맞이했다. 육사는 석초에게 송도 앞바다와의 대면을 이렇게 전했다: "명사(名沙) 50리 동해의 잔물결이 두 사람의 걸어간 자취조차 쓰처버리지 못하고 보드랍게 할터감니다. 깨끗한 일광(日光), 해면(海面)에 접촉되는 즈음 유달리 빛납니다." 

육사의 포항행과 관련되는 귀한 자료로는 몽구(夢驅) 이병각(李秉珏)이 쓴 ‘육사 형님’이란 편지가 있다. 이에 의하면 육사는 9월이나 되어야 상경할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육사의 포항행은 한 달 이상을 계획하고 온 것이다. 단순한 피서 휴양이 아니라 단단히 준비한 여정이었다. 

육사의 포항행과 관련된 편지 이병각의 ‘육사형님’
육사의 포항행과 관련된 편지 이병각의 ‘육사형님’

△태풍 속을 엎어지락자빠지락 나아가는 금강심

그런데 육사는 송도원에 머물던 1936년 8월에는 1908년 기상관측 이래 최장 장마와 최강의 태풍을 만났다. 이해 8월 한 달간 22일 동안 비가 내렸고(2010년 8월에 와서야 24일로 기록 경신). 20~28일에는 역대 최대 최강 태풍인 ‘3693’호가 한반도를 관통해 전국에서 123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육사와 동행하지 못한 이병각은 "장림(長霖)‘장마’이 지리(支離) 하니 형의 해수욕 풍경이 만화의 소재밖에는 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고소하다"며 육사를 놀렸다. 

육사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송도원 바다에, 그것도 밤에 뛰어나갔다. 육사는 이 특이한 경험을 이듬해 발표한 그의 명수필 ‘질투의 반군성(叛軍城)’(1937. 3)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태풍이 몹시 불던 날 밤, 온 시가는 창세기의 첫날밤같이 암흑에 흔들리고 폭우가 화살같이 퍼붓는 들판을 걸어 바닷가로 뛰어나갔습니다. 가시넝쿨에 엎어지락자빠지락 문학의 길도 그럴는지는 모르지마는, 손에 들린 전등도 내 양심과 같이 겨우 내 발끝밖에는 못 비치더군요. 그러나 바닷가를 거의 닿았을 때는 파도 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고, 하얀 포말(泡沫)에 번개가 푸르게 비칠 때만은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 나는 아직도 꿈이 아닌 그날 밤의 바닷가로 태풍의 속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구절은 육사의 문학과 전 생애를 이해하는 데에서 핵심적인 대목이며, 또한 무척 심오하고 아련하다. 육사는 태풍에 맞서 훈련하듯 바닷가를 엎어지락자빠지락 걸어갔다. 여기서 태풍은 일제, 일제로 인한 수난과 고통, 즉 식민지 피의 현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1936년 포항을 다녀간 이후 1937~38년 육사의 시와 수필은  모두  태풍에  맞서는 이러한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소설 ‘황엽전’(1937.10~11)에는 절망적 고난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이 여러 군데 묘사돼 있다. 

‘사람들은 이빨을 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전진합니다. 지나온 길이 얼마이며 가야 할 길이 얼마인 것도 모르면서 죽으나 사나 가야 한다는 것밖에는. 그들은 한 사람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의 발소리와 호흡이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은 이 잔혹한 자연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이었습니다.(…)  유령도 그때야 잠이 깨었습니다. 그리고 몸서리를 치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루한 꿈이며 괴로운 꿈이겠습니까? 유령은 다시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캄캄 암흑 속을 영원히 차고 영원히 새지 못할 듯한 밤을 제 혼자 가는 것입니다.’

‘황엽전’에 등장하는 유령이나 사람들이 눈 내리는 광야에서 ‘엎어질락 자빠질락’ 걸어가는 모습은 육사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라 할 수 있다. 송도 앞바다에서 태풍에 맞서던 자신의 모습이 재현된 것이다. 나아가 육사의 이런 모습은 루쉰의 ‘나그네’를 연상케 한다. 포항에서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루쉰이 사망했고, 육사는 1936년 10월 23~29일, 5회에 걸쳐 ‘루쉰 추도문’을 신문에 연재했다. 루쉰은 ‘나그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그네의 의미는 보내신 편지에 언급하신 바와 같이 앞에 무덤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나아가는 것, 즉 절망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절망에 반항하는 것은 어려운 것으로서, 희망 속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용맹하고 더욱 비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致趙其文, 1925. 4. 11)’ 

육사는 다보탑이 그려진 엽서를 절친 시우(詩友) 신석초에게 보냈다
육사는 다보탑이 그려진 엽서를 절친 시우(詩友) 신석초에게 보냈다

육사는 태풍이 부는 송도 앞바다에서 루쉰의 ‘나그네’처럼 행동했고, ‘식민지 조선  피의 현실’, 정면으로 맞서는 ‘금강심’을 단련해 시를 쓰고자 한 것이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 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계절의 오행(1938.12.)’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으로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으로 ‘피의 현실’에 맞서려는 이러한 자세는 의심의 여지 없이 니체의 ‘초인’, 그 ‘비극적 영웅’을 방불케 한다. 육사 스스로 이러한 ‘비극의 히어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음을 고백한 바 있다. 1941년 여름 그는 경주 ‘S사’에 가서 요양하게 되는데, 신석초로 추정되는 S군에게 자신은 "영원히 남에게 연민은커녕 동정 그것까지도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비극의 ‘히어로’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고 밝혔다.(산사기) 

이렇게 육사는 식민지 피의 현실이 지닌 비극을 정시하면서,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비극적 영웅의 금강심을 단련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러한 금강심으로 "온갖 고독이나 비애를 맛볼지라도 ‘시 한 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육사의 이러한 금강심 단련은 1936년 8월(음력 7월) 포항 송도 앞바다에서 태풍 속에서 엎어지락자빠지락 나아가던 여정에서 시작돼, 1941년 여름  경주 ‘S사’ 요양으로 이어졌다.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중국 북경대학교,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 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로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주해) 백범일지’가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됐으며,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에 선정돼 독일어로 번역됐고, 원본을 탈초·교감한 ‘(정본) 백범일지’를 출간했다.

현재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및 분단과 통일 문제, 한중일 삼국의 전쟁 기억과 기념을 평화의 초석으로 전환시키는 문제, 안중근·이육사 등 근현대 인물의 내면세계 등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관련 저서로는 ‘백범어록: 평화통일의 첫걸음, 김구의 마지막 말과 글’,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강철로 된 무지개: 다시 읽는 이육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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